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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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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와 화개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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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sanggyesa 작성일10-10-07 16:04 조회2,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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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西山)대사와 화개동천(花開洞天) 鄭  然  可

글머리에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겨 그 이름이 역사에 빛나는 서산대사, 그의 보람 있는 삶은 이곳 하동(河東)의 화개동천(花開洞天)에 터를 잡음으로부터 비롯되었었다. 서산(西山)이 시적(示寂)한뒤 그의 사리탑이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보현사(普賢寺)에 세워졌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다 그의 영골을 봉안했다. 또 전라남도 해남땅 대흥사(大興寺)에는 그의 유품을 거두어 보관하고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그의 위업을 기리는 제향사당으로 묘향산에 수충사(酬忠寺), 밀양에 표충사(表忠寺)를 세웠다. 그런데 서산(西山)이 정작 뜻을 세워 몸을 길렀던 하동의 화개동천은 아무런 흔적하나 없으니 뜻있는 이들은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


  빼어난 경관과 함께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 화개계곡에 찾아드는 수많은 관광객의 대부분이 이런 위대한 선인들의 숨겨진 사연들을 모른 채 그냥 지나쳐 버리려니 하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 한량없다.


  그 옛날 홍류교(紅流橋)자리에 새로 축조된 콘크리트 다리 옆에 어울리지 않게 세워져있는 안내판에 서산대사가 수도했던 곳이라는 간략한 내용이 있긴 하나 안내판을 쳐다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고, 설사 눈여겨 읽더라도 별달리 마음에 닿는 게 시원찮도록 안내판일 뿐이다. 차라리 서산이 이곳에서 남긴 시한수라도 새겨 놓았으면 그의 위대한 사상과 함께 이곳의 풍광을 보다 아름답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향 같은 삼신동(三神洞)


  대사가 그의 호를 서산(西山)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만년에 묘향산에 은거하면서 부터였고, 소년 시절 화개에 들어와 얻은 법명(法名)은 휴정(休靜)이었다. 서산(西山)의 어릴 때 이름은 운학(雲鶴), 속성은 완산최(完山崔)씨였다. 그는 1520년(중종15년)3월에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아버지 세창(世昌)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그때 부모의 나이는 이미 50세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먼저 어머니를 잃더니 이듬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도 돌보는 이 없게 된 이 천애고아를 안주(安州) 목사 이사회(李思會)가 찾아보았다. 첫 눈에 비범하게 보이는 소년 운학(雲鶴)을 보살피고자 마침 내직(內職)으로 전근하게 되자 같이 데리고 한양으로 갔었다.


  서산(西山)은 곧 성균관에서 유생들 틈에 끼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처지 때문이었는지 학문은 늘지 않고, 아픈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듯 놀이에만 열중하며 세월을 보내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하루는 어떤 노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노인이 서산(西山)을 알아보고 자기 친구의 아들이라며 소년의 장래를 매우 걱정하더니 마침내 자기집 근처에 작은 서당을 마련하고 그 노인의 친 자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공부를 하게 했으나 역시 깊은 공부가 되지 않음은 마찬가지였다. 3년이 흘러 비로소 생원시(生員試)에 나가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나이 열다섯 되던 해 그를 가르치던 스승이 전라감사(全羅監事)가 되어 남쪽지방 전주로 내려갔다. 얼마 후 서산(西山)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옛 스승이나 한번 찾아본다며 같이 지내던 친구 두 명과 함께 전라도 전주(全州)까지 내려왔는데, 마침 스승은 부모상을 입어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 뒤였다. 이에 세 소년은 이왕 내려온 김에 남쪽지방의 산천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유랑생활을 하며 두류산(頭流山)으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구례의 화엄사, 연곡사, 하동의 칠불암, 의신사, 쌍계사 등 크고 작은 절간들을 두루 구경하며 반년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화개(花開)골짜기에서 숭인(崇仁)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하필 서산(西山)을 보고는

 

『자네는 기골이 청수하니 결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여 공명심에 연연하는 생각을 영원히 버려라. 서생(書生)의 업(業)은 평생을 허둥대도 백년의 노력이 허튼 이름뿐이리니 실로 아깝다.』하며 불문(佛門)에 들어 올 것을 권하는 것이었다.

 

 이에 서산(西山)이

 

『어떤게 마음을 비우는 공부라 하옵니까?』하며 반응을 보이니 그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한 참 만에

 

 『간단히 말하기 어렵다.』며 전등록,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 반야경 등 여러 권의 서적을 들어내 보이며 읽어 보고 깊이 생각하면 불문에 들어올 수 있다. 하더니 따로 측근에 자리하고 있던 영관(靈觀)대사 부용(芙蓉)에게 낯선 소년 서산(西山)을 맡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함께 유랑하던 두 친구는 다시 한양으로 떠나고 달리 의지할 데가 없는 서산(西山)은 지리산 속 화개동천(花開洞天)에 남아 절간에 몸을 의탁했다. 그로부터 숭인(崇仁), 영관(靈觀) 두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3년을 보냈다. 나이 열여덟, 머리가 커지고 생각이 점점 성숙해지니 고향도 그립고, 너무 일찍 떠나버린 아버지와 어머님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결 설레게 하는 봄을 맞이하여 한수의 시를 쓰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자(漢字)의 원문(原文)은 생략한다.

 


                  창밖에 슬피 울던 두견새소리

                  눈에 가득 봄 산이 다 고향 같도다.

                  물 길어 오다, 문득 돌아보니

                  흰 구름 사이에 청산이 떠 있어라.

 

    

  만리타향에서 고행의 길로 접어든 외로운 소년은 이 짧은 글귀에 그의 심경과 주변의 경관을 담아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들어냈다. 이날 그는 비로소 머리를 깎았다. 

  

그리운 화개동천(花開洞天)

 

  서산(西山)은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버린 화개동천(花開洞天)의 여러 절간을 찾아다니며 수도(修道)에 전념했다. 주로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 삼철굴(三鐵窟), 원통사(圓通寺), 원적암(圓寂庵), 신흥사(神興寺) 등 여러 사암(寺庵)들이 그의 도랑이었다.

 

  1546년 가을 서산(西山)은 13년동안 몸담아 공부하던 화개(花開)를 떠나 이제 더 넓은 선계(禪界)를 찾아  보고자 운수행(雲水行)에 나섰다. 낡은 장삼차림에 표주박 하나만 춤에 매달고 오대산, 금강산 등지의 유서 깊은 유명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불도의 경지를 다졌다. 31세 되던 해 마침내 그는 주위의 권유에 못 배겨 별로 내키지도 않응 승과(僧科)에 나가게 된다. 그는 곧 중선과(中禪科)에 장원으로 뽑히고, 연이어 대선(大禪)을 거쳐 불교계에서는 고위직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이 시기는 명종임금의 모후인 문정황후가 불교육성책을 펼침으로서 서산(西山)의 생애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그가 화개(花開)에서 『차라리 한평생을 못생긴 놈으로 지낼지언정 맹세코 글자풀이나 하는 강사노릇은 않겠다.』며 마음을 다지고 수도에 정진한 결실이 밖에 나와 이처럼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는 곧 왕실의 전용 기도처인 선교의 종찰(宗刹) 봉은사 주지까지 겸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딴 데 있었다. 뭇사람들의 시선이 끌리는 고위직이나 화려한 명성은 그의 본분에 맞지 않았다. 봉은사 주지를 맡은 지 2년 만에 모든 직첩을 벗어 던지고 한양을 떠나고 만다.

 

『괴롭고 무의미한 영화로움이 꿈처럼 흘러 지나버렸다.』고 술회하며 승과에 오른 것부터를 부질없는 잡념으로 단정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단출한 차림으로 표주박 하나만 매달고 먼저 금강산을 찾았고, 묘향산, 구월산등지로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 정진하면서 다시 찾을 지리산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못내 그리워했다. 멀리 지리산속의 친구들에게 보낸 문안 서찰들에 그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언제나 생각느니 강남의 달, 자고새울고 온갖 꽃피어 향기로운 곳…』 

 

『…노부(老夫)는 지팡이를 잡고 자주 그림자를 돌아 볼 뿐이오. 때때로 남쪽을 바라보며, 날아 내리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오. 귀뚜라미 곁에서 꿈이 깨매, 몸이 만첩산봉에 누었으니 어찌할까, 어찌할까…』

 

『…1년은 열두 달이요 한 달은 서른 날, 하루는 12경인데, 하루 열두 번씩 마음 둔들 어찌할까. 생각한들 어찌할까. 아득하여 이만 씀.』

 

다시 화개(花開)에 청허당(淸虛堂)을 짓고

 

  1560년(명종15년) 서산(西山)은 다시 화개동천(花開洞天)으로 돌아왔다. 나이 41세였다. 그는 신흥계곡에 허물어져 쓸어져가는 옛 암자 내은적암(內隱寂庵)을 손질, 개축하여 청허당(淸虛堂)이라 이름 지었다. 내은적암(內隱寂庵)은 신라 때 왕족 거서한(居胥旱)이 처음 세웠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불교의 핍박에 훼철되었던 암자였다.

 

  서산(西山)은 전국8도에서 시주를 얻어 2년에 걸쳐 청허당(淸虛堂)을 지으니 비로소 거처할 곳을 마련하게된 것이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의 유유자적한 삶을 들어낸 시(詩)를 한 수 남겼다.

 


      스님 대여섯이 내 암자 앞에 방을 지었네.

      새벽종소리에 함께 일고 저녁 북 울리면 같이 잠드네.

      달빛에 집 앞 물 함께 길어 차 다려 향기 나누며,

      날마다 무슨 일 하는가, 염불이고 참선이네.

 


  서산(西山)은 청허당(淸虛堂)에서 그가 남긴 많은 저서중의 력작(力作)인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청허당(淸虛堂)에 거처를 전한 이듬해 신흥사 주지 옥륜(玉崙)스님이 사찰 앞 범왕 골짜기와 의신계곡에서 사납게 흘러내리는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바윗돌을 다듬어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어 드나드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였는데 다리는 홍류교(紅流橋)라 하고, 누각은 능파각(凌波閣)이라 이름 지었다. 큰일을 도모한 옥륜(玉崙)스님이 서산(西山)으로 하여금 능파각기문(凌波閣記文)을 짓게 하니 서산(西山)은 서슴없이 아래의 기문을 썼다. 원문은 생략하고 한글로 풀이된 것만 소개한다. 

 

신흥사 능파각기(神興寺 凌波閣記)

 

  해동(海東)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전해오니 두류산이 그중의 하나다. 두류산은 영, 호남 사이에 있는데 이곳에 한절이 있어 그 이름이 신흥사다. 절간이 있는 깊숙한 골짜기가 이른바 화개동천(花開洞天)인데 이 입구가 매우 좁아 사람이 마치 항아리 속을 드나드는 것 같다. 동쪽으로 바라보이는 한 골짜기에는 푸른 학이 산다하여 청학동이라 부르고, 남쪽을 바라보면 강 건너에 몇 개의 봉우리를 거느린 산이 있어 백운산이라 하는데 거기서는 늘 흰 구름이 피어 솟는다.

 

  화개동천이 깊은 곳에 너 댓 집의 작은 마을이 있다. 꽃나무며 대나무 숲이 마을 언저리에 흩어져 있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을 사람들의 차림새는 매우 소박하고 모발도 예스럽다. 이들은 땅을 골라 씨 뿌려 거두는 일만 알뿐, 만나고 찾아오는 이는 늙은 중이 있을 뿐이라 마을은 절의 들머리가 되어있다.


  신흥사에서 남향으로 수십 걸음 내려가면 동쪽과 서쪽의 두 냇물이 만나 하나의 큰 내를 이루는데, 맑은 물이 부딪히고 곤두박질로 소리를 내면서 뒤집힐 때마다 흰 물보라가 구름처럼 튄다. 참으로 천하의 기관(奇觀)이라 할만하다. 냇가 양언저리는 수천 개의 흡사 소와 양의 뿔 같은 바위들이 쭈뼛쭈뼛한데 이 모습은 태초에 하늘이 이토록 신령스럽게 숨겨 놓은 것이리라. 겨울에는 얼고, 여름에 비 나리면 사람들이 다닐 수 없어 불편함이 많았다.

 

  명종16년 여름에 신흥사 주지 옥륜이 같이 수도하는 조연(祖演)스님으로 하여금 이 바윗덩이를 다듬어 긴 돌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다섯 칸의 누각을 지어 단청을 곱게 하도록 하였다.

 

  다리는 홍류교(紅流橋)라 이름 짓고 누각은 능파각(凌波閣)이라 불렀다. 승려들은 여기서 선의 경지를 찾게 되고 시인들은 시흥을 짜내고, 도사들은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 않고도 바람을 이끌며 날렵하게 다닐 수 있다. 옥륜(玉崙)과 조연(祖演)등은 이 그윽한 공간에 마음을 맡기고, 흐르는 구름에 몸을 숨기며, 지팡이 집고, 한가하게 휘파람 불기도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며, 혹은 누어서 늙음의 절박함도 잊은 채 오히려 즐거움에 취한다. 또 누각에 오르면 몸이 하늘로 떠서 별들이 만져줄 것을 바라는 듯 한 신비로움을 경험하고, 눈길이 천리에 이르매 하늘에 오른 듯 한 황홀함을 느낀다.

   

  외로운 따오기와 저녁놀은 등왕각(신선이 사는 궁전)의 운치요, 아득한 산봉우리들은 봉황대(봉황이 노니는 상상의 선경)의 풍치라. 풀꽃 곱게 피어 맑은 물 언덕을 덮었으니 황학루의 정경이 여기요, 낙화유수는 무릉도원의 경개(景槪)로다. 가을단풍 화사로우니 적벽(赤壁:중국 황하유역에 위치한 명소)의 경치인들 이와 다르리오. 귀한 벗 맞고 보내매 호계(虎溪)는 농부들, 낚시질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  목욕하는 사람들, 바람 쏘이는 사람들, 풍월을 읊는 사람들, 물고기가 노는 것을 보고, 달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이 누각에 올라와서 제각기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즉 이 누각이 사람들의 흥치를 돕는 것 얕지 아니하고, 또 비바람과 눈과 빙판을 만나도 건너는 자가 옷을 걷을 수고가 없으니 쉽게 건너게 해준 공이 크다. 다리와 누각을 이루어 숱한 즐거움이 이렇게  한꺼번에 갖추어졌으니 어찌 어진자만이 이를 즐길 수 있다고 할 것인가?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태초에 하늘이 신령한 곳을 숨겨 놓은 것을 지금 옥륜(玉崙)과 조연(祖演)스님이 구름을 헤치고 산문(山門)을 열어 드디어 산과 골짜기와 시내와 절간을 인간 세상에 들어나게 만들어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한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재물을 옳게 쓸 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이 누각을 천간 만간으로 늘려 천하 사람들을 덮어 줄까.

 


                                            명종 19년(1564)

                                                                                          휴 정(休  靜) 씀

 

 

  서산(西山)은 이 기문(記文)을 통하여 하늘이 숨겨놓은 신령스러운 곳이라며 화개동천(花開洞天)의 경관을 자랑했다. 기문(記文)을 쓴 서산(西山)은 별도로 자신의 감흥을 읊어 한수의 시를 남기니 이른바 신흥사 능파각 홍류교 시다. (원문을 생략한다)

 


     다락에 걸린 구름 물결 따라 흐르고,

     산승은 오늘도 무지개를 밟고 섰네.

     사람의 운명이 어지럽기 그 몇 번 이련가,

     세월이 백성을 저버려 늙는 줄 모르네.

     봄 저문 골짜기에 꽃비 휘날릴 제

     달 밝은 하늘아래 다락은 비어 있소.

     물소리 솔바람은 천년의 음악인데

     만고의 누리에서 한바탕 웃어보네.

 


  30년 만에 찾아본 고향  

  

  청허당(淸虛堂)에서 집필을 마무리한 삼가귀감(三家龜鑑)은 유 불 도 삼교사상(儒 佛 道 三敎思想)의 강요(講要)를 진술하여 종교간의 부질없는 대립을 지양하고 서로 유통하면서 커다란 목표인 ‘하나’에 도달하는 방안이 제시된 서산(西山)자신의 종교관이 강하게 담겨있는 저술이었다. 그는 세 종교가 명칭은 비록 다르나 도(道)의 진원과 목표는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산(西山)은 1564년에 이 책의 서문(序文)을 쓰고, 목조판각을 조각하여 인쇄하고자 원고를 들고 산청군 단성면에 소재한 단속사로 찾아갔다. 단속사에는 목판조각과 인쇄에 능한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해에 걸쳐 판본이 완성되고, 이제 곧 인쇄에 들어가려는 참에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유생 성여신(成汝信)이 책의 내용이 그의 뜻에 거슬린다하며 절의 인부들을 시켜 판각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트집인즉, 불교, 도교, 유고의 교리를 논하면서 유가를 맨 뒤에 둔 것은 곧 유생을 가볍게 여긴 때문이라며『…불도 따위가 외람되게 유를 논하느냐』고 거세게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성(成)유생은 우윤 성두년(成斗年)의 아들로 남명 조식(南溟 曺植)의 제자였다. 느닷없이 폭력을 당한 서산(西山)은 크게 실망했다.

 

  이때는 불교를 중흥시킨 문정황후 죽고 불교계의 큰 기둥이었던 보우(普雨)가 요승으로 몰려 제주도에서 장살당한 뒤였다. 유학생들의 끈질긴 주청으로 명종 임금은 다시 억불정책을 쓰게 되니 서산(西山)은 맥이 빠졌다. 일찍이 서산(西山)은 유학의 근본도 알고 싶어 산청 덕산동의 조식(曺植)을 찾아 가끔 내왕하였고, 이황(李滉), 양사언(楊士彦), 소세양(蘇世讓)등과도 교류하여 유불을 가리지 않고 친교를 맺어왔었다. 그가 조식(曺植)의 친필 한 폭을 받고 보낸 서찰이 있다.

 

  『…강정(江亭)에서 한번 이별한 뒤에 반딧불이 나는 것을 다섯 번 보았으니 진실로 목마르게 그리운 회포를 금할 수 없습니다. …친필 단장(短章)한폭을 받자오매 자획이 굳세고 의사가 맑아서 뒷사람의 마음과 눈을 열어줄만하여 더욱 감사합니다.』

 

  또 퇴계 이황(李滉)의 글씨 한 폭을 전해 얻고 무척 고마워 한 글도 있었다.

 

 『…하루도 간절하게 생각지 않음이 없었는데 홀연 친필 한 폭을 받자와 머리털 속에 명주(明珠)를 얻은 듯 하여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선방(禪房)의 궤 속에 넣어두고 길이길이 완미 하겠습니다….』


  힘들여 쓴 책이 발간직전에 망가지게 되니 그 아픔은 오죽했으랴마는 밖으로는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큰 실망을 안겨준 지리산이 그의 꿈을 펼치는데 마땅한 소요처가 안 될 것 같아 마침내 화개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흔 여섯의 나이에 20년간 정들었던 삼신동을 떠나려니 허리에 흰 구름을 두른 첩첩산봉우리들이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때 그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시가 전한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청학의 둥지에 학은 아니 돌아오네.

    잘있거라 홍류교아래 흐르는 물이여. 

    너는 바다로 가고, 나는 산으로 가려네.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고자 화개동천(花開洞天)을 나선 서산(西山)은 모처럼 거처까지 마련하고 살려고 했던 터를 잃은 비탄스러움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 떠나왔던 고향이 그리웠다. 비록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출가한 몸이나 어릴 때 이미 부모를 모두 잃고 아무런 마음 걸리는 인연이 있을 것 없으니, 그 고향을 한번쯤 찾아 향수에 젖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의 평안남도 청천강변의 安州는 묘향산에 들어가기 전에 들릴 수 있었다. 고향 옛 마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봄날이 저물어가는 석양 무렵이었다. 옛 집터에서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한 노파의 손을 붙잡고 자기가 어릴 때 부르던 운학(雲鶴) 소년이었음을 밝히며 빛바랜 장삼 깃을 여미니 그 노파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다. 이날 서산(西山)은 귀향(歸鄕)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그의 심정을 토로하며 비로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실로 철이 들고 처음 느끼는 설움이었다.

 


   집 떠난 지 30년에 고향이라 찾아드니

   알던 사람 없어지고 눈 익은 집 다 헐었네.

   푸른 산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저무는데

   두견새 소리만 멀리서 들려오네.


   아이들 떼 지어 문틈으로 엿보고

   이웃집 늙은이는 누구냐고 묻는 구나

   아이 때 부른 이름 이르자 서로우니

   하늘은 바다련듯 달은 벌써 삼경일세.

 


  서산(西山)은 묘향산에 다시 은거하며 때로는 금강산으로 찾아 저술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리산에서 실패한 삼가귀감(三家龜鑑)도 새로 집필하여 완성했다. 이 세상이 어지러우면 초연히 현실에 때묻지 않는 사람은 무고를 당하기 십상이다. 진주의 선비 최영경(崔永慶)을 괜히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가담했다고 잡아 죽이는 세태라 서산(西山)도 산중에서 미치광이 땡 중의 무고를 당해 역시 정여립(鄭汝立)과 관련이 있다하여 투옥되는 촌극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 선조는 그의 무고함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이 비범함을 살펴 상까지 내리며 풀어 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임진란이 터지자 선조임금은 의주 행재소에서 다급한 김에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 서산(西山)을 불러 구원을 청했던 것이다. 일흔 살의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서산(西山)을 반갑게 맞은 임금은『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그대가 힘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하니 서산(西山)은 서슴없이『승려로써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가지 못 할 자는 신의 도움을 기원하고 나머지는 소승이 통솔하여 싸움에 나아가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하고 물러나와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들이 구국전선에 앞장서도록 했던 것이다. 승군의 지휘자가 된 서산(西山)은 문도1500여명을 이끌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때 선조임금은 순안(順安)으로 그를 불러 팔도선교도총섭이라는 최고 승직을 내렸다. 승군은 그 수와 전투력이 날로 늘어 한양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몸이 너무 늙어 막중한 군직을 감내하기 어려워 사명당에게 지휘권을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그에게 극일대도서사라는 불교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이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려 나라를 구한 공로와 그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1604년(선조37) 묘향산 원적암에서 제자들을 불러 모아 최후설법을 마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세수85세이며 화개동천에서 불문에 발을 들여 놓은 지 67년인 그가 눈을 감은 날은 정월(正月) 스무사흘날이었다.

 

  진충보국하는 정신으로 승도들의 결속을 다짐했고, 배불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불교가 되살아날 수 있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한 정치적인 가치관까지 바꾸어 놓은 큰 업적을 남긴 西山은 이렇게 하여 그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위대한 삶이 바로 화개삼신동(花開三神洞)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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