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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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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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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sanggyesa 작성일10-07-27 08:21 조회1,9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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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水然) 스님! 그는 정다운 도반이요, 선지식이었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입으로 말하지 않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그런 사람이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그는 사소한 일로써 나를 감동케 했던 것이다.

수연 스님! 그는 말이 없었다. 항시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그를 15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잊혀지지 않는 얼굴(象)이다.

1959년 겨울, 나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혼자 안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준비래야 삼동(三冬) 안거 중에 먹을 식량과 땔나무, 그리고 약간의 김장이었다. 모시고 있던 은사 효봉선사가 그 해 겨울 네팔에서 열리는 세계 불교도 대회에 참석차 떠나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력 시월 초순 하동(河東) 악양(岳陽)이라는 농가에 가서 탁발을 했다. 한 닷새 한 걸로 겨울철 양식이 되기에는 넉넉했었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걸망을 내려 놓고 부엌으로 가보았다. 낯선 스님이 한 분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그네 스님은 누덕누덕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그때 그와 나는 결연(結緣)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순간적으로 맺어질 수 있는 모양이다. 피차가 출가한 사문(沙門)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리산으로 겨울을 나러 왔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반가웠다. 혼자서 안거하기란 자유로울 것 같지만, 정진하는 데는 장애가 많다. 더구나 출가가 연천(年淺)한 그 때의 나로서는 혼자 지내다가는 잘못 게을러질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월 보름 동안거(冬安居)에 접어드는 결제일(結制日)에 우리는 몇 가지 일을 두고 합의를 해야만 했었다. 그는 모든 일을 내 뜻에 따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정진하는 데는 주객이 있을 수 없다. 단 둘이 지내는 생활일지라도 둘의 뜻이 하나로 묶어야만 원만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전혀 자기 뜻을 세우지 않았다. 그대로 수순(隨順)하겠다는 것이다. 육신의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모자랐지만, 출가는 그가 한 해 더 빨랐다. 그는 학교 교육은 많이 받은 것 같지 않았으나 천성이 차분한 인품이었다. 고향이 어디이며 어째서 출가했는지 서로가 묻지 않는 것이 승가(僧家)의 예절임을 아는 우리들은 지나온 자취 같은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사람의 언행이나 억양으로 미루어 고향과 출신지를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나처럼 호남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소화 기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나는 공양주(供養主 ; 밥짓는 소임)을 하고 그는 국과 찬을 만드는 채공(菜供)을 보기로 했다. 국을 끓이고 찬을 만드는 그의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시원치 않은 감일지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감로미(甘露味)가 되었다. 나는 법당과 정랑의 청소를 하고 그는 큰방과 부엌을 맡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한 끼만 먹고 참선만을 하기로 했었다. 그때 우리는 초발심한 풋내기 사문들이라 계율에 대해서는 시퍼랬고 바깥일에 팔림이 없이 정진만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 해 겨울 안거를 우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뒤에 안 일이지만 아무런 장애없이 순일하게 안거를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듬해 정월 보름은 안거가 끝나는 해제일(解制日). 해제가 되면 함께 행각을 떠나 여기저기 절 구경을 다니자고 우리는 그 해제일을 앞두고 마냥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해제 전날부터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찬물로 목욕한 여독인가 했더니, 열이 오르고 구미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자꾸만 오한이 드는 것이었다. 해제는 되었어도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산에서 앓으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사문은 성할 때도 늘 혼자지만 앓게 되면 그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감촉된다.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이에 의료기관도 없다. 그저 앓을 만큼 앓다가 낫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철저하게 무소유였다. 밤이면 헛소리를 친다는 내 머리 맡에서 그는 줄곧 앉아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 끓여 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주느라고 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잠깐 아래 마을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한낮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기울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쑤어둔 죽을 저녁까지 먹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밤 열 시 가까이 되어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새 나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의 손에는 약사발이 들려 있었다.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약을 마시라는 것이다.

이때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의 헌신적인 정성에 나는 어린애처럼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암자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래야 40여 리 밖에 있는 구례읍이다. 그 무렵의 교통수단이라고는 구례 장날에만 장꾼을 싣고 다니는 트럭이 있었을 뿐. 그러니까 그날은 장날도 아니었다.

그는 장장 8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온 것이다. 서로가 돈 한푼 없는 처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구례까지 걸어가 탁발을 하였으리라. 그 돈으로 약을 지어온 것이다. 머나먼 밤길을 걸어와 약을 달였던 것이다. 자비가 무엇인가를 나는 평생 처음 온 심신으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반의 정(情)이 어떤 것인지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간절한 정성에 낫지 않을 병이 어디 있을까. 다리가 좀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 다음날로 나는 기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가 거처하던 암자에서 5리 남짓 깊숙이 올라가면 폭포 곁에 토굴을 짓고 참선하는 노장(老長) 스님 한 분이 계셨다. 노장님이 무슨 볼일로 동구 밖에 다녀올라치면 으레 우리들 처소에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노장님이 메고 온 걸망은 노장님보다 먼저 토굴에 가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져다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듯 무슨 일이고 그가 할 만한 일이면 말없이 선뜻 해버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 못한 채 각기 운수(雲水)의 길을 걸었었다. 서신 왕래마저 없으니 어디서 지내는지 서로가 알 길이 없었다. 운수들 사이는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통했다.

세상에서 보면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서로가 공부하는 데 방해를 끼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고(苦)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재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고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는 것이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긴 것이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사문들은 어느 모로 보면 비정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기류다. 긍정의 지평(地平)에 선 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로운 것이다.

내가 해인사로 들어가 퇴설선원(堆雪禪院)에서 안거하던 여름, 들려오는 풍습에 그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름 살림이 끝나면 그를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더니, 그가 먼저 나를 찾아 왔었다. 지리산에서 헤어진 뒤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서로 반기었다. 그는 예(例)의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내 손을 꼬옥 쥐었다. 함께 있을 때보다 안색이 못했다. 앓았느냐고 물으니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약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가 퇴설당에 온 후로 섬돌 위에는 전에 없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여남은 켤레 되는 고무신이 한결같이 하얗게 닦이어 가지런히 놓여 있곤 했었다. 물론 그의 밀행(密行)이었다. 스님들이 빨려고 옷가지를 벗어 놓으면 어느새 말끔히 빨아 풀먹여 다려놓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를 보고 스님들은 '자비보살' 이라 불렀다. 그는 공양을 형편없이 적게 하였다. 물론 이제는 우리도 삼시 세 끼를 스님들과 함께 먹고 지냈었다. 한 날 나는 사무실에 말하고 그를 데리고 억지로 대구로 나갔었다. 아무래도 그의 소화기가 심상치 않았다. 진찰을 받고 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버스 안에서였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주머니 칼을 꺼내더니 창틀에서 빠지려는 나사못 두 개를 죄어놓았다. 무심히 보고 있던 나는 속으로 감동했다. 그는 이렇듯 사소한 일로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는 내 것이네 남의 것이네 하는 분별이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도 자기 소유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실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 해 겨울 우리는 해인사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한 스님들은 그를 자유롭게 지내도록 딴 방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 똑같이 큰방에서 정진하고 울력(작업)에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반 살림(안거 기간의 절반)이 지날 무렵 해서 그는 더 버틸 수가 없도록 약해졌다.

치료를 위해서는 산중보다 시처가 편리하다. 진주(晋州)에 있는 포교당으로 그를 데리고 갔었다. 거기에 묵으면서 치료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흘이 지나자 그는 나더러 살림중(安居中)이니 어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병세가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친분이 있는 포교당 주지 스님과 신도 한 분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그가 하도 나를 걱정하는 바람에 나는 일주일만에 귀사(歸寺)하고 말았다.

두고 온 그가 마음에 걸렸었다. 전해오는 소식에는 많은 차도가 있다고 했지만. 그 겨울 가야산에는 눈이 많이 내렸었다. 한 주일 남짓 교통이 두절될 만큼 내려 쌓였었다. 밤이면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눈에 꺾인 것이다. 그 고집스럽고 정정한 소나무들이 한 송이 두 송이 쌓이는 눈의 무게에 못이겨 꺾이고 마는 것이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 꺾이는 묘리를 산에서는 역력히 볼 수 있었다. 꺾여진 나무를 져 들이다가 나는 비로소 손목을 삐고 말았다. 한동안 침을 맞는 둥 애를 먹었었다.

한 날 나는 조그마한 소포를 하나 받았었다. 펼쳐보니 파스가 들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사 보낸 것이다. 말이 없는 그는 사연도 띄우지 않은 채였다. 나는 슬픈 그의 최후를 되새기고 싶지 않다. 그가 떠난 뒤 분명히 그는 나의 한 분신(分身) 이었음을 알 것 같았다. 함께 있던 날짜는 일년도 못 되지만 그는 많은 가르침을 남겨주고 갔다.

그 어떤 선사보다도, 다문(多聞)의 경사(經師)보다도 내게는 진정한 도반이요, 밝은 선지식이었다.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나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인 것이다.

수연(水然)! 그 이름처럼 그는 자기 둘레를 항상 맑게 씻어주었다. 평상심(平常心)이 진리임을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성내는 일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말로 해서 자비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법정스님 첫 수필집 '영혼의 모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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