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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조실 고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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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무 작성일05-07-25 04:45 조회14,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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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조실 고산스님
 
“내 허기 채우고 남 도우려면 영원히 모자라”


지난 2월16일 부천 석왕사 약사재일 법회. 법사로 초청된 쌍계사 조실 고산(山)스님은 이날 법문을 두 번 했다. 한번은 법당에서 한번은 방에서. 여남은 명의 신도들이 스님 앞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하소연을 끌러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드는 사연들은 대개 무심한 남편, 철없는 자녀를 겨누고 있다. 2시간에 걸친 법문에 피곤할 법도 한데 스님은 귀찮은 기색 하나없이 이런저런 불평과 낙담을 다 들어주고 다독였다. 한달에 달포는 이런 식으로 보내는 것이 스님의 일상이다. 일흔이 넘었으니 아무래도 지쳐 보인다. 느닷없이 ‘불교는 뭐냐’는 우악스런 물음을 던지기가 생뚱맞았다. 그러나 대답은 거침없었고 항상 생활 속의 예시와 비유를 섞어 친절히 설명했다. 스님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온 ‘관념’을 위해 군불을 넣어주고 밥을 먹였다.




‘자리이타’는 보살도정신…내가 남을 이롭게 하자는 뜻

너무 앞서다 낭패말고 너무 처져 짐되지 말라는게 ‘중도’



-불교는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설한 중도(中道)는 진제(眞諦)에도 속제(俗諦)에도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속제는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 먹고 사랑과 명예 실컷 누리고 사는 것이요 진제는 이것을 전부 버리라는 이야깁니다. 화려한 옷에만 집착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누더기만 골라 입어도 안 되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헌옷이라도 깨끗이 빨아 입으란 말이지요.”

-삶의 질서를 유지하란 말씀입니까.

“너무 앞서가다 낭패를 보지 말고 너무 뒤쳐져 남의 짐이 되지 마십시오.”

-정말 수중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어떻게 보시합니까.

“밥 한 숟갈은 있지 않습니까. 적으면 적은 대로 주십시오. ‘내 허기부터 채운 뒤에 너를 도와주겠다’고 하면 계속 모자랍니다.

-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말합니다. 남 도와주는 일에만 열중하다 내 몸을 해친다면 그것도 참다운 불자의 행동은 아닐 듯한데요.

“자리이타는 ‘내 몫 먼저 챙기고 남 생각해주자’는 뜻이 아닙니다. ‘리(利)’를 ‘나를 이롭게 하자’가 아니라 ‘내가 이롭게 하자’라고 해석해야죠. 내가 먼저 다리를 건너가 안전한 지 확인하고 남을 건너게 하고, 먼저 불법을 깨우쳐 남을 가르치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보살도입니다.”

-계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포수에 쫓겨 헐레벌떡 뛰어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슴을 스님이 장삼자락으로 덮어 가려주었습니다. 포수가 와서 사슴 못봤냐고 묻자 스님이 못 봤다고 대답합니다. 한 생명을 살렸는데 거짓말했으니 계를 어긴 죄로 스님을 처벌해야겠습니까.”

-어쨌든 스님은 거짓말을 한 과보를 받게 될텐데요.

“거짓말하고 나만 업을 당하면 그만이지. 살생이란 큰 죄를 저질러 포수까지 죄업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불가피한 경우에는 계율을 어길 수도 있습니까.

“예컨대 사기꾼 하나가 피해를 당한 친구들에게 붙잡혀 뭇매를 맞을 지경에 처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근처 포장마차에 들어가 이들에게 술을 사주고 설득해 겨우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어요. 같이 어울리느라 술도 마셨습니다. 계율을 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누군가의 곤경을 외면한다면 그것도 이기심입니다.”

-“불교는 ‘최고’가 아닌 ‘최적’을 지향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불교는 ‘어떤 한 생명이 만생명에게 심각하게 해악을 끼친다면 제거해도 괜찮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나만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의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때를 전제로 합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길. 순간순간 어떤 행동이 중생을 위하는 것인가 고민해야죠.”

불교에서는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이판(理判), 사찰운영 및 유지를 담당하는 일을 사판(事判)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이사(理事)를 두루 겸비할 때 참다운 수행자로 높이 산다. 스님은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이사무애입니까.

“익히 알려진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이 있죠. 백장회해 선사가 만든 청규의 한 구절입니다. 참선수행도 교학강의도 스님의 일이지만 대중을 위해 목탁치고 다같이 밭으로 나가 김을 매는 것도 일입니다. 수좌라 해서 골방에 죽치고 앉아 고통을 지고 찾아오는 신도들을 멀리하거나, 주지라 해서 마음공부는 뒷전인 채 주판만 튕기면 곤란하죠.”

-실천 없는 정신은 무능하고, 먹고사는 일에만 골몰하면 천박해지기 십상이겠죠.

“재가자들도 이사에 걸림이 없어야죠. 언제나 수행정진하며 자신의 진면목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늘 다른 사람을 공경해야죠. 살림도 야무지게 하고.”

스님은 균형과 화합을 강조했다. “부처님은 49년 동안 네 가지 주제에 대해 설법했습니다. 처음엔 ‘있음(有)’에 관한 것, 두 번째는 ‘없음(無)’에 관한 것. 다음은 ‘있지도 없지도 않은 것(非有非無)’. 그리고 마지막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亦有亦無)’에 관한 내용이죠.” “부처님은 유와 무를 동시에 인정했다.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다. 다만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에 핀 진달래와 올해 핀 진달래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당연한 ‘여백’과 ‘차이’를 억지로 메우고 지우려 할 때 삶은 고단하다. 〈벽암록〉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얻었다고 하나 원래 있었던 것. 잃었다고 하나 원래 없었던 것.’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상식적으로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에게 더 무거운 벌을 주어야 하겠지요.

“일단 싸웠으면 똑같이 추방합니다. 그게 불교의 법도입니다. 서로 뉘우치고 다시 돌아오라 합니다. 나는 죄가 ‘없다’ 하고 너에게만 죄가 ‘있다’고 따지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요.”

-과거사 청산논쟁 등으로 정계가 시끄럽습니다.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먼저 무릎 꿇고 빌라’ 윽박지르면 겨우 일으킨 양심도 분노로 돌변하기 마련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화합도 없습니다.”

현대가 정법이 쇠한 말법(末法)시대라는 풍문을 자주 들었다. 스님도 “지구는 탄생 이후 21번 동안 정법이 상승.하락 주기를 반복하다 소멸하는 데 지금이 제9감급 시대”라며 “오늘날은 사람들의 근기가 미약해지는 시대”라고 시인했다. 그렇다면 전쟁과 빈곤, 욕망의 창궐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숙명론은 불교와 어울리지 않는다. 스님도 동의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은 인류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씩씩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자기 배 불리는 데에만 혈안이 돼 삶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은 없어요. 정신이 허약하니 말세사상에 쉽게 현혹되는 것이고. 아름다운 역사는 부단한 수행 속에 만들어지는 축복입니다.” 진눈깨비 날리는 도시는 검고 야위었다. “얼굴엔 검버섯이 피고, 눈은 멀어지고, 검은 머리칼이 파뿌리가 되고, 세월이 가면 남는 것은 늙음 밖에 없다”는 스님의 법문이 귀에 쟁쟁하다. 아무리 기고 날아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독재. 강력한 시간과 씁쓸한 퇴화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스님이 남긴 화두다. 부천=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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