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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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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sanggyesa 작성일10-12-15 12:42 조회3,9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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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은 지혜의 길, 공즉시색은 자비의 길
공은 무한한 기쁨 보시의 자비와 다르지 않아
욕망이라는 용어 탐욕처럼 멀리할 필요 없어
 
 《반야심경》에 나오는 저 구절은 불자라면 다 안다. 그리고 불자가 아닌 일반인도 불교를 잘 모르나 저 구절이 지닌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매료되기도 한다. 그런데 불자라도 남들이 저 구절에 대한 뜻을 물으면, 시원하게 응답하지 못하고 아리송한 생각으로 헤맬 수 있다. 저 구절은 불교사상의 철학적 핵심이다. 《반야심경》에만 저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불경의 기본을 가로지르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색만 공이 아니고, 수상행식(受想行識=감각과 감정/생각과 표상/욕망과 의지/인식과 분별)도 색과 공의 관계와 같다고 《반야심경》은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색과 공의 관계만을 기술해 본다. 그것을 이해하면 나머지 다른 것도 자동적으로 풀린다.

색=우주의 존재 일체
 우선 색이란 용어가 생소하다. 일반적으로 저 용어를 잘 쓰지 않는다. 보통 색을 물질이라고 옮긴다. 대개 물질이 다 어떤 색깔을 띠고 있으므로 색을 색깔이라고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색깔이 없는 물질도 있다. 예컨대 바람과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색을 꼭 물질로만 제한하기도 어렵다. 천신, 귀신, 영가 등은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즉 색은 존재하는 것들로서의 존재자(存在者)와 유사한 의미겠다. 존재자는 다 명사로 옮겨진다. 색은 명사로 개념화될 수 있는 일체의 존재자를 뜻한다고 보여진다. 개념적인 존재자들은 다 단독명사로 인간에 의하여 지시되기 때문에, 이 우주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존한다고 우리가 착각하기 쉽다. 나무, 구름, 별, 자동차, 생명체, 천신 등등은 다 독립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이 우주에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은 다 연생(緣生)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다. 이것을 불교는 의타기성(依他起性=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질)이라 부른다. 
 나무의 예를 들면, 한 그루의 나무도 햇볕과 물과 바람과 흙의 도움을 받아 싹이 트고 자라며, 또 그 나무도 주위의 사람들의 식생활방식과 깊은 인연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구름도 모든 세상의 물들이 증발하여 엉긴 수증기고, 바람의 작용과 태양의 온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태양도 우주의 다른 별들과의 상관관계와 인력의 작용으로 존립하고 있다. 인연이 다하면 저 태양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이처럼 연생의 상호적인 힘으로 얽혀 있다.

일체 존재자의 색은 ‘공’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들을 비록 우리가 단독명사로 명명했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단독적 힘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 다른 것들의 힘을 받아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들을 다시 설명하면 일체의 존재자는 다 다른 것들의 흔적들이 새겨져 이루어진 그런 흔적들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일체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다 도자기의 존재방식과 유사하다. 도자기는 도공이 흙을 물로서 빚고 다시 불에 구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는 약품이 첨가되고 색깔도 입혀지고 도공의 솜씨와 아이디어도 가미된다. 인간의 존재방식도 저 도자기의 존재방식과 다르지 않다. 보통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굳건히 실존한다고 착각한다. 그 ‘나’는 사실상 많은 다른 것들의 흔적이 첨가되고 부가되어 모인 물질과 생각들의 기(氣)가 모여서 엉긴 가상적 존재에 불과하다.
 우선 나의 몸은 부모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빌려 온 것일 뿐만 아니라, 나의 전생의 업도 거기에 추가된 것이다. 빌려온 부모의 몸과 생각도 기실 양가 조부모님의 몸과 생각과 단절되어 성립하지 않는다. 또 부모님들의 몸과 생각도 그들이 생전에 만난 다른 사람들의 업에 영향을 받아서 복합적으로 모인 영향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또한 양가 조부모님들의 몸과 생각도 각각 무수한 사람들과의 접촉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이 행한 자연들과의 교접도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나’는 단독적 실체고 명사가 아니라, 사실 천문학적으로 많은 업들의 축적으로 얽혀진 압축된 업의 알맹이다. 또 그 알맹이 안에 많은 다른 업들의 흔적이 파동처럼 새겨져 있다.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나’라는 것은 없고, 나는 단지 타자들(사람들과 자연물들)의 업들이 새겨진 흔적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흔적의 모임이고, 소위 이른바 ‘내’속에는 무수한 다른 이들의 흔적들이 있다. 나는 그 타자들의 흔적이고, 타자들도 나의 흔적에 불과하다. 흔적의 집합은 번개나 아침이슬처럼 환영(幻影)에 불과하므로 조건이 달라지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래서 지옥과 천당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환영으로 존재하기에 환각에서 깨어나면 일시에 사라진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인연으로 생긴 일체의 존재자로서의 색은 다 공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색=환영적 존재=환유
 이것이 색즉시공의 뜻이다. 이 말을 철학적으로 번안하면, 색을 개념적인 존재자로서 생각하지 말고, 환영적인 존재로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존재를 불교는 환유(幻有)라 말한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용어로 표현하면,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 존재자는 고정된 명사적 개념을 뜻하고, 존재는 명사적 개념이 아니고 이 세상 만물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만물의 존재방식이 연생적 환유의 존재방식이므로 따라서 ‘존재는 공’과 같다. 이 말의 의미는 일체 삼라만상의 존재를 소유하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이 색을 존재자적인 명사로 생각한 까닭도 기실 모든 것을 인간이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장악하고 소유하려는 탐욕의 마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즉시공은 모든 소유론적 탐욕의 어리석음을 알려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존재하는 일체가 존재자가 아니고, 환영이므로 탐욕의 마음은 결국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헛되어 소유하려는 어리석음에 비유된다. 이것을 유루법(有漏法)이라 부른다. 당나라의 은둔거사 한산(寒山)의 비유를 적으면, 유루법은 “대나무 소쿠리로 물을 담으려는 짓”과 같다. 모든 소유론은 다 유루법에 해당한다.

공=우주기=태허기=선천기
 그런데 공즉시색은 색즉시공과 그 뉘앙스에서 다르다. 색즉시공이 모든 소유욕의 허망함을 암시하고 있다면, 공즉시색은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인 일체의 색이 다 공의 무한 허공에서 솟은 공의 보시며 공의 증여라는 것이다. 허공과 같은 공은 텅 비어 있어서 어떤 힘도 없는 허무의 심연처럼 오해되기 쉽다. 서양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약점은 저 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단지 아무 것도 없는 허무적 결핍의 개념으로서만 인식하였다는 데에 있다. 존재하는 환유는 다 인연 따라 생멸을 반복하지만, 공은 생멸의 세계를 초탈하고 있다. 환유적 존재는 다 일시적인 가탁(假託)이지만, 공은 불변하고 영원하다. 공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한 자유의 세계고,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다 섭수해서 존재하도록 허여해 주는 너그럽고 원융한 세계다. 그러면서 공은 무한한 힘을 솟게 하는 근원이다. 이 우주는 한량없는 에너지의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장자가 그것을 야마(野馬=아지랑이)나 진애(塵埃=먼지)로 표현했다. 거시세계의 중력에서부터 미시세계의 전자기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에너지 기(氣)로 충만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은 이 모든 우주기의 근원이다. 이를 동양철학은 태허기(太虛氣)라고 불렀고, 화담 서경덕은 선천기(先天氣)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공은 무한기와 무한대의 힘을 상징한다.

마음 있으나 주체는 없다
 공즉시색은 무한대의 힘의 원천인 공으로부터 삼라만상의 환유적 존재가 일어나고 생기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공은 존재를 보시하고 증여하는 무한능력의 표현이다. 색은 그 공의 무한능력의 공덕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솟은 금빛 찬란한 비단결의 무늬와 같다. 말하자면 색은 비로자나불인 법신불의 보광명지(普光明智)에 의하여 보시된 보신불인 노사나불의 아름다운 법색(法色)이다.

이미 이 우주의 삼라만상의 색은 다 비로자나불의 법을 전달하는 형형색색의 메시지다. 삼라만상의 색은 비로자나불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용솟음치는 기쁨의 환희심이다. 그렇게 보면 마치 기독교 신학처럼 어떤 인격적 주체가 있어서 그 인격이 우주를 주재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격적 주재의 개념은 너무 우주를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제한적 사고에 머물고 있다. 불교는 그런 인격신의 개념을 유치하다고 멀리한다. 비로자나불은 일심(一心)으로서의 우주심(宇宙心)의 근원이다. 이것은 인격적 개념은 아니다. 마음은 있으나, 마음을 만드는 주체는 없다. 즉 행위는 있으나 행위의 주체는 없다. 이상한가? 천둥과 번개는 있으나, 천둥과 번개를 만드는 주체가 없지 않은가?. 이것이 불교다. 자연의 공과 색은 왜 마음인가? 자연은 욕망(원력)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힘을 나타내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이 때 욕망은 나의 소유욕이 아니고, ‘그것(渠)’의 욕망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불교는 욕망이라는 용어를 너무 탐욕처럼 멀리할 필요는 없다. 욕망도 인간의 소유론적인 것과 자연의 존재론적인 원력으로 나누어진다. 서산대사가 이미 암시했듯이, 그 ‘그것’은 인격을 배제하는 의미다. 그냥 우주법이 우주심임을 알리는 방편일 뿐이다.

 색즉시공은 모든 소유법이 유루법이고, 존재론적 무루법(無漏法)을 익힐 것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사유는 공의 도리에로 우리를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이 승’에서 쌓은 소유는 다 버리고 간다. 오직 ‘이 승’에서 우리가 행한 존재방식만이 마음의 업연(業緣)되어 ‘저 승’에 간다. 이것이 무루법의 지혜다. 그리고 또 공즉시색은 공성(空性)의 본질이 무한 보시의 자비임을 가르쳐 준다. 공은 무한한 기쁨으로 자신을 현시하려는 보시의 자비와 다르지 않다. 일체의 색은 그 무한 공성의 기쁨을 눈에 보이도록 가시화하는 존재의 몸이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두 축에 의거해 있게 된다. 색즉시공은 지혜의 길을, 공즉시색은 자비의 길을 각각 말한다. 

김형효/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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