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총림(叢林) 쌍계사

역대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총림(叢林) 쌍계사

진감혜소국사(774 ~ 850)


진감혜소국사

신라말 선승(禪僧)으로 불교음악인 범패를 최초로 도입
지리산 쌍계사에서 산문(山門)을 열고 많은 제자 양성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차문화발전에 공헌


신라하대의 시대적 배경

진감선사(我璧禪師) 혜소(慧昭, 774~850)는 신라 하대 선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이다. 특히 실천적 수행과 포교활동을 통해 선사사상을 보급하는데 큰 업적을 세웠고,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로서 숭앙받는 분이다. 선사가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 사회가 점차 무너져가던 하대였다.
이때부터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의 155년동안이 하대에 해당한다. 신라하대는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라사회를 지배해왔던 골품제의 모순에서 야기된 것이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진감선사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살다 간 분이었다. 하대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즉 중대까지 융성하던 교학불교는 의상(義湘)과 그 제자들에 의한 화엄종이 중심이었는데 8세기 중엽부터는 실천보다는 교학적인 경향이 강했다.

9세기 전반 도의(道義)선사가 당 지장(智藏)에게서 선사상을 전해 받고 돌아오면서 바야흐로 신라하대의 선사상이 보급되었다. 821년(현덕왕 13) 도의선사의 귀국은 신라불교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선사의 사상과 활동은 교학불교로 일관하였던 당시 불교계에 이단으로 보였고, 또 국가적으로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선사상은 시대의 조류였고, 역사의 한 흐름이었다. 도의선사의 뒤를 이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척선사에 의해 선사상은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선사는 홍덕왕의 지지를 받으며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신라사외에 선사상을 본격적으로 전하는데 기여하였다.
선종의 전래는 기존의 중앙중심이고 귀족중심이던 교학불교에서 벗어나 불교를 지방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선종의 교화방법이 문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수심에 의한 직관위주의 실천절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마음만 잘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법의 해석은 지방호족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소의경전에 의존하기보다는 심전에 의해 불법을 전수하며 누구나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선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존의 교종을 대표하던 화엄종은 새로운 도전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교의 갈등은 하대불교의 또 다른 발전상을 전개시켰고, 이 둘이 갈등속에서 공존하였지만 10세기에 이르면 선종의 위세가 불교계를 이끌어간 중추세력이 되었다. 즉 9세기 중반 이후 국가에서 책봉한 국사는 모두 선승이었던 것이다. 당시 선승의 대표적 인물은 무염선사였다. 선사의 명성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귀족들은 스님의 선문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신라하대 화엄사상과 선사상〉,《신라문화》6,1989)
선종의 확산은 신라 지방호족의 열렬한 지지에 크게 힘입은 덕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사상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지방호족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되었다는 지나친 정치적 평가는 옮지 않다. 선종은 지방호족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다양한 산문의 개창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선종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도의와 무염, 그리고 혜송 등의 선사들은 교종의 지나친 관념화에 새로운 실천적 불교사상을 존개하면서 신라사회와 불교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출생과 출가

혜소선사는 신라말의 선승(禪僧)으로서 시호(誰號)는 진감(我態)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德氏)이다. 그는 중국에서 도를 닦아 귀국하여 선종(禪宗) 을 신라사회에 전파하였으며 쌍계산문(雙豁山門)을 개창하여 신라하대 선 불교의 융성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선사에 관한 기록은 하동(河束)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영탑비문이 유일한데 이것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혜소의 선조는 산동지방(山束地方)의 벌족(閥族)이었던 한족(淡族)으로 수(隋)와 고구려의 전쟁 시 고구려에 항복하여 고구려민이 되었다가 신라 통일기에 이르러 금마(金馬)에 정착한 유민(流民)이었다.
그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신분을 밝히고 있다.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의 벌족(問族)이었다. 수나라 군사가 요동정벌에 여맥에서 많이 몰살당하였는데, 항복하여 백성이 되었다. 그러다가 당(唐)나라가 전복 뭉쳐서 사군(四郡)을 통괄하였을 때 금마(金馬)사람이 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의 신분은 신라통일기에 귀부한 고구려계 유민의 후손으로 생각되며 최씨라는 성을 사용한 점에서 6두품 계층까지도 상정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중앙에 기반을 둔 계층이라기 보다는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이런한 점은 신라하대의 선종이 지방세력과 밀착되었던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그의 아버지인 창원(昌元)은 독실한 불교도로 재가신도이면서도 출가승과 같이 수행하였다. 혜소 역시 꿈에 범승(梵僧)이 나타나 유리 항아리를 전해주며 아들이 되기를 소원하는 꿈을 꾸고 난 후 태어났다. 어머니 고씨가 어느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르고 나서 유리 항아리를 주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사를 임신하였다.
따라서 그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도인 동시에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던 금마지역에 사민(徙民)된 고구려계 유민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출가승과 같이 수행할 정도의 지식을 갖춘 계층의 후손이었으며 이와 같은 학문적 바탕을 통해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혜소는 아이들과 놀 때에 나뭇잎으로 향을 삼아 사르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는 등 어려서부터 독실한 불교도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불교도였던 그였지만 비교적 늦은 31세의 나이로 출가하게 된다. 그의 출가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집에 한 말의 곡식도 없고 한자의 땅도 없어 생선장사를 통해 부모를 봉양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생활고를 겪게 되어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불법을 구 할 뜻을 세웠던 것이다. 최고 6두품까지 상정할 수 있을 그의 출생신분을 생각할 때 그의 곤궁은 의외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금마지역이라는 백제의 유풍(遺風)이 강하게 남아있던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 과 당시 구 백제계의 음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상항이었음을 감안할 때 일조각, 1986. 卯.256- 276) 중앙으로부터의 감시와 고구려 계라는 불리한 성분이 이러한 곤궁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외에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며 이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는 현실적인 문제 가 해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불법에 귀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의 출가가 31세라는 늦은 나이였던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에서의 유학생활

부모의 죽음 이후 혜소는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歳貢使)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이르러 창주(沧州)에서 신감대사(神鑑ᄎ師)의 제자가 된다.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뵈었다.
몸을 던져 절하고 반쯤 일어서려는 순간대사가 기꺼워하면서
"반갑다. 이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하고는 곧바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였다.

신감은 마조 도일(媒祖 道ᅳ)의 80대 제자로 남종선(南宗禪)의 선사(禪 師)였다.(《宋高傲傅》권20,麽沧州雲秀山神떻傳) 따라서 혜소는 신감의 문하에서 선사상을 수용하고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날로 정진하여 신감의 제자들로부터 동방의 성인’ 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대중들에게도 얼굴이 검지만 뛰이난 도가 있다고 하여 중국불교 흥기의 발판을 마련한 도안(道安)법사의 별명과 같은 흑두타(黑頭陀)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혜소는 810년(헌덕왕 2) 당나라 숭산(많山)에 있는 소림사(少林 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더욱 정진하게 된다.
원화 5년에 숭산 소림사의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가 전에 꾼 꿈과 완전히 부합하였다. 계를 받고 나서 다시 학사로 돌아가 경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꼭두서니 보다 붉고 남빛보다 푸르러 가르쳐 준 스승보다 나았다.

당시 소림사는 많은 선사들이 참례하는 장소로서 그 곳에서 혜소는 상당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소림사가 북종선(北宗禅)과 남종선(南宗禅)을 모두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곳에서의 수행으로 혜소는 북종선을 받아들일 수 잇는 사장적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계를 받은 후 그는 다시 교학연구에 매진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각지르 유람하며 묻고 배우며 도를 구한다. 즉 그는 선수행과 교학연구의 실천적 겸수(兼修)를 시도하여 걸식수행인 두타행(頭陀行)을 통해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의 방법을 취하게 된다.이러한 가운데 해소는 그보다 앞서 당나라에 갔던 신라 선종의 초전자(初傳者)인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편력하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탐구한다.
그때 마침 우리 나라의 스님인 도의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니 서와 남에서 친구를 얻은 것이다. 서방으로 찾아다니면서 부처님의 지견(贄見)을 증득(證得)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혜소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불교사상을 접하였고, 선사상을 독자적으로 체득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의가 먼저 귀국하자, 혜소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고요히 참선하였고 그 뒤에는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이러한 과정들 역시 혜소가 실천적 선수행을 통해 독자적 선사상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귀국 후의 포교활동

이러한 고행을 통해 실천적 불교사상을 체득한 그는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尙州) 장백사(長栢寺)에 주석하게 된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는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는 흑의 이걸(黑衣 二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 입은 뛰어나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라가 기쁘게 기대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수행을 중심으로 했던 중국에서와는 달리 혜소는 귀국한 뒤 아직 선사상이 자리잡지 못한 신라사외에 선사상을 소개하고 확대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 보다 먼저 신라에 귀국한 도의가 교종중심의 불교계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북산(北山)에 은거하였던 것과는 달리 혜소는 흥덕왕의 환대 속에서 선사상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던 것이다. 도의의 경우와 같이 초기의 선사들은 왕실이나 귀족계층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의보다 9년 늦게 귀국한 혜소는 흥덕왕의 귀의를 받으며 왕실과 관련된 선종 사원인 장백사에 주석하게 된다. 이것은 교종에 의해 주도되던 부교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그들과 결탁한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왕실의 의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교종의 교세가 드높던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흥덕왕의 죽음 이후 혜소는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원의 문에 병자가 많듯이 오는 자가 구름과 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드디어 보행으로 진주의 지리산에 이르렀다.

위의 비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상주에서의 교화활동에 많은 어려 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문도가 모여들어 그를 따랐지만 형편이 어려웠다는 점은 불교계와 그와의 갈등 및 흥덕왕 사후 왕실과의 소원함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가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에서도 이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상주를 떠나 지리산으로 옮겨가 교세의 확장을 꾀한다.
혜소가 상주에서 지리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리산이 선사상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신라에 전해진 북종선의 선사들이 지리산 단속사(断谷寺)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남종선의 세력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혜소가 지리산에 처음 도착한 곳이 화개곡 (花開谷)에 있는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尚)의 활동지역이었다는 점과 이 삼법화상이 육조정상절취사건(六祖頂上哉取事件)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남종선 세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혜소가 구족계를 받은 소림사가 북종선의 유풍이 강하게 남아 있는 동시에 남종선도 수용하고 있었던 곳이라는 점에서 혜소의 이주 근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지리산으로옮겨간 혜소가 지리산에 자리잡고 교화를 계속하고 있던 838년(민애왕 1) 민애왕이 즉위하여 그를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응하지 않는다.
개성(開成) 3년 민애왕이 갑자기 일금의 자리에 올라 깊이 불교에 의탁하였다.
명령을 내려 재(齎)의 비용을 준비하고 따로 친견(親見)하기를 구하였다.
선사가 "부지런히 선정(善政)에 힘쓰는데 있는 것이지, 어찌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민애왕은 그가 색과 공을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고 하며 소성왕(昭聖王)의 이름을 피하여 혜소라는 호(號)를 내린다. 그리고 황룡사(皇龍寺)에 승적(僧籍)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청하였다. 호를 내렸다는 점과 황룡사에 승적을 올렸다는 점은 혜소와 연계를 맺고자 한 왕실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혜소는 은근한 거절의 뜻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왕실에 거주하는 자로서 국왕의 복을 빌지 않는 자가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왕과의 관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아래 그는 남령 기슭에 옥천사(玉泉寺), 지금의 쌍계사)를 짓고 조계 육조(曹溪 六朝)의 영당(影堂)을 세우는 등교세의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그 곳에서 여러 해를 머무니 법문 듣기를 청하는 이가 벼와 삼대처럼 줄을 지어 거의 송곳 꽂을 곳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 드디어 좋은 경계를 돌아다니며 찾아 남령의 산기슭을 얻으니, 상쾌하고 앞이 탁 트여서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가람을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높은 봉우리를 의지하였고 앞을 내려다보면 구름 덮인 시내를 누르고 있었다.
법손을 손꼽아 헤아려 보니 선사는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 혜능의 영당을 세우고, 채색을 단청하여 널리 중생제도에 이바지하였으니 경에 이른바 “ 중생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비단에 여러상을 섞어 그린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선사는 교세의 확장과 문도의 증가에 힘입어 쌍계산문을 개창하게 된다. 그의 대중교화에 대한 부단한 노력과 검소한 실질위주의 생활은 많은 사람 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남종선의 소개와 확산에 노력하던 혜소는 이를 위해 옥천사와 영당을 건립한 것이다. 영당의 건립을 통하여 혜소는 신라하대의 선종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이라 보인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혜소는 850년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고, 헌강왕(惠康王)대에 이르러 진감이라 시호하고. 탑호를 대공영탑이라 하였다. 혜소는 성품이 꾸밈이 없고 한결같았으며 소박하였고 대중과 함께 수선 하는 실천적 자세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진(眞)을 지키고 속(俗)을 거스름 에 정성을 다함을 으뜸으로 삼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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