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총림(叢林) 쌍계사

역대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총림(叢林) 쌍계사

휴정서산대선사 休靜西山大禪師


자는 玄應, 다른 호는 淸虛堂이다.
속성은 崔氏요 완산사람이며, 이름은 汝信이다.


아버지는 箕子殿 참봉인 世昌이고 어머니는 김씨로, 기이한 태몽을 꾸었다. 선사는 경진년(1520)에 태어났다. 21세에 崇仁長老 밑에서 삭발하였고 一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으며, 31세에 禪科에 합격하여 선교 양종판사에까지 이르렀다. 己丑獄事때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명하여 석방토록 하고 御畵와 御詩를 하사하였으며, 산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사는 칼을 잡고 行在所에 나아갔으며, 선조의 명으로 八道都摠攝에 제수되었다. 선사가 문도들과 승려들을 나누어서 명나라 군대를 도우는 한편, 직접 싸움터로 나아가 수많은 적을 물리쳤으며, 御駕를 호송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선사가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면서,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宗置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휴정서산대선사

갑진년(선조 37년,1604)에 묘향산 圓寂庵에서 앉아 入寂하시니, 세수 85세요 선랍 65세였다.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當集)』8권이 간행되었으며 필적은 가늘면서도 힘이 있고 운치가 있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김씨는 선사를 잉태하였을때 기이한 꿈을 꾸었고, 태어나 세살이 되었을때 홀연히 한 늙은이가 찾아와서, "어린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였다. 늙은이는 아이를 끌어안고 몇마디 주문을 외운 다음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마땅히 이름을 雲鶴이라 하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문을 나갔는데, 그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려서 장난을 하고 놀때면 반드시 불교적인 놀이를 하였고, 자랄수록 풍채와 정신이 영특하고 빼어나 말을 하면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으니, 州의 牧使에게까지 사랑을 받고 '奇童'이라 불리어졌다. 10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의지할 바 없는 외톨이가 되자, 주의 목사가 경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균관에 나아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을 답답하게 여기다가,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유람길에 올랐다. 마침내 두류산에 들어가 바위골짜기의 모든 빼어난 경치를 구경한 다음, 內典(불경)을 두루 열람하다가 홀연히 출가할 뜻을 발하여 동료들에게 이별의 시를 남겼다.
물을 길어 돌아오다 머리를 돌려보니
靑山은 무수히 白雲 속에 있구나

드디어 崇仁長老에게서 머리를 깎고 一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때는 중종 35년(1540) 경자년으로 선사의 나이 21세였다. 靈觀大師를 찾아가 參問하고 인가를 얻은 다음 촌락을 遊行하다. 한낮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음이 있어 탄식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일생동안 어리석은 사람이 될지언정 鉛?阿師가 되지는 않겠노라" 하고는 붓을 잡고 '落葉' 이라 제목하여 시를 지었다.
머리는 희어져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들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장부의 할 일은 능히 마쳤도다

이로부터 관동의 여러 명산을 떠돌아 다니며 노닐다가, 우연히 서울에 들어가 禪科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에까지 올랐으나 홀연히 자리를 버리고 풍악산(금강산)에 들어가 '三夢吟'을 지었다.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 妖僧의 무고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본말을 명확히 밝히자 본래부터 그 명성을 듣고 있었던 선조가 곧바로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따로 불러 御製一色과 御?墨竹 병풍을 하사하였다. 선사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은혜에 감사하니 임금이 더욱 칭찬하고 후대하여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서쪽으로 行幸함에, 선사가 산을 나와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에 나아가 알현하자 임금이 말씀하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있으니 山人인 그대 또한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선사는 눈물을 흘리며 "원컨대 죽을 때까지 싸우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八道禪敎都摠攝의 제수를 명하였다. 선사가 여러 上足들에게 의승병을 모집할 것을 명하자. 惟政이 관동에서 일어났고, 處英이 호남에서 일어나 權慄과 병사를 합하여 행주산성에서 싸웠다. 선사는 스스로 문도 1천5백인을 거느리고 명나라 군대를 따라 나아가 평양을 수복하였다. 명나라의 經略 송응창, 提督 이여송 및 三協總兵 이하 모든 부장들이 선사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첩을 보내 공경히 치하하였다. 어떤 이가 시를 보내 찬미하였으나, 예로써 공손히 사양하였다.
서울이 회복되어 上將軍이 먼저 수레를 돌려 돌아갔으므로, 선사는 승도 수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임금에게 청하기를 "신은 늙어서 머잖아 죽을 것이니, 원컨대 군대에 관한 일은 제자 惟政등에게 전부 맡기고 사직원을 내고 돌아가기를 바라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호를 하사하였다.
원적암에서 示寂하기 전에 눈길을 무릅쓰고 묘향산에 있는 여러 암자를 두루 찾아 부처님께 예배하고 설법하였다. 방장으로 돌아와 목욕하고 위의를 갖추어 불전에 분향한 다음 붓을 들어 스스로의 진영에 題하였다.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또 유정과 처영 두 문인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선랍 65세였으며, 기이한 향기가 여러 날 동안 방안에 가득하였다. 다비 후 靈骨 1편과 사리 3립을 취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부도를 세웠다. 유정?자휴 등은 다시 頂骨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 사리 여러 과를 얻어 유점사 북쪽 언덕에 묻었다. 선사가 젊었을 때 영관대사의 법을 얻어 종풍을 떨쳤으니, 근대에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제자는 1천여 인인데 이름이 난 이만 하여도 70여인이나 되고, 능히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 지방의 宗主가 20여인이 넘었으니, 참으로 훌륭하도다. 노년까지 해탈 자재로웠는데, 피상적인 무리들이 혹 戒를 뛰어넘은 선사의 자재로움을 의심하였으나 識者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게송은 명랑하여 놀랄만한 구절이 많았고, 필적은 활달하고 굳세고 운치가 있었으며, 행장을 서술함에 또한 이와 같음을 갖추었다. 아아, 선사의 幻身이 이미 재가 되었는데, 직접 경험한 것만 幻하지 않고 일편석으로 변하였으니, 어찌 몇 장의 글이 선사의 불후한 삶을 나타낼 수 있으리. 그러나 그 도가 너무나 높아 차마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없기에 길이 세상에 전하고자 함이로다.
張維(효종의 장인)가 비문을 짓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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