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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창연한 '철학의 빛' 깊이 들여다보기

쌍계사
2021-08-10 11:43
작성자
쌍계사
작성일
2021-08-10 11:43
조회
1135
20년간 단청 문양 기록한 저자
위대한 미의 결집 '꽃'에 집중
깊이 있는 설명·순례지 추천도

한국의 옛집이나 사찰을 방문했을 때 단청을 보고 한 번쯤 사진이라도 찍어 본 사람이라면 관심이 고조될 만한 책, <한국의 단청-화엄의 꽃>(노재학 지음)이 최근 발간됐다.

노재학은 한국의 전통에 관심이 많은 사진작가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사진과 건축·불교철학·미술사학 분야를 독학했고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통 건축의 단청 문양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연구했다. 이 책은 그런 발품의 결정체라 하겠다.

책 머리말을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단청에 빠져 사는지 가늠할 수 있다. "빛이 깊숙이 들어오는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간은 단청장엄 사진 작업의 황금 시간대이다. 그 시간이 되면 마룻바닥에 반사된 자연 빛이 내부의 단청장엄을 환하게 밝히기 때문이다. 어둠에 길든 무겁고 가물가물한 단청 빛이 따스한 질감의 고색창연한 빛으로 극적으로 되살아난다. 그 순간 벅찬 환희심이 뒤따른다."

노 작가는 단청 꾸밈을 '단청장엄'이라고 표현한다. 궁궐이나 사찰 같은 전통 건축물에선 엄숙함을 더해야 하기에 '장식'이 아니라 '장엄'이라고 한단다.


▲ 고성 옥천사 팔상전 천장 단청 문양, /갈무리

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고귀한 빛'에는 고전주의 경향의 단청을 담았고 2장 '화엄의 빛'에는 바로크 경향, 3장 '중중무진의 빛'에는 낭만주의 경향, 4장 '적멸의 빛'에는 인상파 혹은 추상주의 경향, 5장 '통도사의 빛'은 1~4장까지의 꽃장엄 형식이 모두 모인 것으로 한 사찰만 다뤘다. 그리고 6장 '법고창신의 빛'은 근현대 미술 경향과 맞닿은 여러 사찰의 단청을 담았다.

'단청'이라 함은 한자로 치자면 붉고 푸른색인데 적청황백흑의 다섯 가지 색, 즉 오방색으로 문양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을 말한다. 오방은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를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인식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작가는 "한국의 단청은 철학의 빛"이라고 했다.

이 책은 여러 단청 중에서도 '꽃'에 집중하고 있다. 꽃을 미의 상징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설명된 대로 '식물의 생식기관'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자연 스스로 숱한 탐색과 경험, 정보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미의 우주적 집합이 한 송이 꽃이다.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의 감각 기관과 생활방식을 수천만 년 동안 내밀히 분석하고 탐색하여 마침내 펼친 위대한 미의 결집들이 아닐 수 없다."(서문)


▲ 통영 안정사 명부전의 장엄한 천장 반자 단청. /갈무리

작가는 "대웅전, 극락전, 약사전 등 한국 산사 법당은 청정한 숲의 이미지를 갖는다"고 했다. 단청의 이미지를 단순화했을 때 아래쪽은 붉고 위쪽은 푸른 나무의 형상이요, 이것이 모여 이룬 것이 숲이니 그 말도 일리 있다 하겠다.

이 책이 재미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유는 전국에 있는 여러 사찰의 단청 문양을 보여주고 하나하나 깊이 있는 설명을 달았다는 점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혹시 내가 봤던 사찰의 단청이 나오지는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또 막연하게 보았던 그 문양에는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인지 찾아보게 된다.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이해가 쉽겠다. 문양은 자연의 무늬와 달리 형이상학적 표현이다. 말하자면 무늬를 추상화해 상징과 관념을 담은 것으로 종교성을 띨수록 정신적 관념은 더 고도화한다고 하겠다.

고성 옥천사 팔상전 천장에는 넝쿨 문양이 나온다. 작가는 이 문양을 보고 "넝쿨의 생명 에너지가 충만한 가운데 팔엽연화가 활짝 꽃을 피웠다"고 표현했다. 넝쿨(덩굴) 문양은 사찰뿐만 아니라 민가의 생활용품 장식으로도 많이 쓰인다.

작가는 통영 안정사 명부전 천장 반자 문양에 관해 "투박하지만 전통을 근현대의 색채 감각과 디자인 기법으로 상당히 세련되게 재해석했다"며 "특히 팔엽연화문을 팔각형 법륜처럼 기하학적으로 도안한 안목은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 하동 쌍계사 대웅전 천장 단청. /갈무리

다양한 단청 문양을 설명한 글을 읽다 보면 단청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보는 눈이 생겼다고 할까. 하동 쌍계사 대웅전에 있는 천장 반자(492쪽)에는 특이하게도 연잎이 일곱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사각 반자가 교차하는 종다라니에는 연화를 중심으로 동심원 파문이 물결처럼 번져나가고 있음을 시각화했다.

책을 읽다 보면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많이 만나게 된다. 감실, 귀틀, 공포, 문설주…. 어쩌면 사찰 방문 시 써먹을 수 있는 고급 지식을 충족시켜주는 책이기도 하겠다. 책 뒤편에 전통 단청 문양이 현존하는 사찰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권역별 단청 순례 사찰 이름을 덧붙였다. 경남에는 고성 옥천사, 양산 신흥사, 양산 통도사, 창녕 관룡사, 합천 해인사가 이에 해당한다. 미진사. 511쪽. 5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