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한 고승
조선불교를 부흥시킨 대선사
쌍계사 중창조사
불일암에서 수행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법호는 청허淸虛, 자字는 현응⽞應이다. 속성은 최씨崔⽒요, 완산사람이며 이름은 여신汝信이다.
아버지는 기자묘箕⼦廟 참봉인 세창世昌이고 어머니는 김씨다. 기이한 태몽을 꾸었는데, 잠결에 한 노파가 찾아와 예를 올리고 “놀라지 마십시오. 장부를 잉태하겠기에 제가 와서 축하를 드리는 것입니다.”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에 1520(경진)년에 선사가 태어났다. 21세에 숭인장로崇仁⾧⽼ 밑에서 삭발하였고, 일선화상⼀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으며, 31세에 禪科에 합격하여 선교 양종판사에까지 이르렀다. 기축옥사⼰丑獄事때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으나, 선조가 명하여 석방토록 하고 어화御畵와 어시御詩를 하사하였으며, 산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사는 칼을 잡고 행재소⾏在所에 나아갔으며, 선조의 명으로 팔도도총섭⼋道都摠攝에 제수되었다. 선사가 문도승려들과 함께 직접 싸움터로 나가 수많은 적을 물리쳤으며, 어가御駕를 호송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선사가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면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都⼤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1604(갑진 선조 37)년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앉아 입적⼊寂하시니, 세수 85세요 법랍 65세였다.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鑑, 선교석禪敎釋, 운수단雲⽔壇, 삼가일지三家⼀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當集 8권이 간행되었으며, 필적은 가늘면서도 힘이 있고 운치가 있다. 밀양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 되었다.
선사가 태어나 세살이 되었을 때 홀연히 한 늙은이가 찾아와서, “어린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였다. 늙은이는 아이를 끌어 안고 몇마디 주문을 외운 다음 머리를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마땅히 이름을 운학雲鶴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늙은이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나갔는데 그가 간 곳은 알지 못하였다. 선사는 어려서 장난을 하고 놀때면 반드시 불교적인 놀이를 하였고, 자랄수록 풍채와 정신이 영특하고 빼어나, 말을 하면 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으니 기동奇童이라고 불리어졌다. 10세에 부모상을 당하여 의지할 바 없는 외톨이가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이 경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균관에 나가 공부 하게 되었다. 여러번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을 답답하게 여기다가,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유람길에 올랐다. 두류산頭流⼭, 지금의 지리산 화엄동華嚴洞, 연곡동燕⾕洞, 칠불암七佛庵등의 크고 작은 절들을 찾아 다니며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조그만 암자에서 한 노숙⽼宿, 덕이 높은 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은 숭인崇仁스님이었는데, 운학을 본 숭인 노숙은 첫눈에 그가 범상치 않음을 간파한다. 숭인스님에게 경전을 공부하던 운학은 동료들에게 이별의 시를 남기고 출가를 한다.
급수귀래홀회수汲⽔歸來忽回⾸
청산무수백운중⾭⼭無數⽩雲中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수많은 청산이 흰구름 속에 솟았네.
선사는 드디어 숭인장로崇仁⾧⽼에게서 머리를 깎고 일선화상⼀禪和尙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때는 1540(경자 중종 35)년 선사의 나이 21세였다. 영관대사靈觀⼤師를 찾아가 참문參問하고 인가를 얻은 다음 촌락을 유행遊⾏하다가, 한낮에 닭울음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음이 있어 탄식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일생동안 어리석은 사람이 될지언정 문자나 외우는 법사가 되지는 않겠노라”하고는 붓을 잡고 시를 지었다.
발백비심백髮⽩⾮⼼⽩ 고인증누설古⼈曾漏洩
금청일성계今廳⼀聲鷄 장부능사필仗夫能事畢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마쳤네.
이로부터 관동의 여러 명산을 떠돌아 다니며 노닐다가, 우연히 서울에 들어가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선교양종판사까지 올랐으나, 홀연히 자리를 버리고 풍악산(금강산)에 들어가 삼몽사三夢詞를 지었다. 기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 승려의 무고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본말을 명확히 밝히자 본래부터 그 명성을 듣고 있었던 선조가 곧바로 석방하라고 명하였고, 따로 불러 자기가 손수 그린 묵죽墨⽵ 한 폭에 시 한수를 지어 하사했다. 선사가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은혜에 감사하니, 임금이 더욱 칭찬하고 후대하여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서쪽으로 행행⾏幸함에, 선사가 산을 나와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에 나아가 알현하자 임금이 말씀하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있으니 산인⼭⼈인 그대 또한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에 선사는 눈물을 흘리며 “원컨대 죽을 때까지 싸우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팔도선교도총섭⼋道禪敎都摠攝의 제수를 명하였다. 선사가 전국의 제자들에게 의승병을 모집할 것을 명하자, 유정惟政이 관동에서 일어났고, 처영處英이 호남에서 일어나 권율權慄과 병사를 합하여 행주산성에서 싸웠다. 선사는 스스로 문도 1천5백인을 거느리고 명나라 군대를 따라 나아가 평양을 수복하였다.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 제독提督 이여송 및 모든 부장들이 선사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글월을 보내 공경하고 치하하였다. 어떤 이는 시를 보내 찬미하였으나, 예로써 공손히 사양하였다.
서울이 회복되어 상장군上將軍이 먼저 수레를 돌려 돌아 갔으므로, 선사는 승도 수백을 거느리고 임금을 호위하여 도읍으로 돌아왔다. 임금에게 청하기를 “신은 늙어서 머잖아 죽을 것이니, 원컨대 군대에 관한 일은 제자 유정惟政등에게 전부 맡기고 사직원을 내고 돌아가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호를 하사하였다.
원적암에서 시적⽰寂하기 전에, 눈길을 무릅쓰고 묘향산에 있는 여러 암자를 두루 찾아 부처님께 예배하고 설법하였다. 방장으로 돌아와 목욕하고 위의를 갖추어 불전에 분향한 다음, 붓을 들어 스스로의 진영에 제題하였다.
팔십년전거시아⼋⼗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또 유정과 처영 두 문도에게 이별의 편지를 보내고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선랍 65세였으며, 기이한 향기가 여러날 동안 방안에 가득하였다. 다비 후 영골靈⾻ 1편과 사리 3과을 취하여 보현사와 안심사에 부도를 세웠다. 유정과 자휴⾃休 등은 다시 정골頂⾻ 1편을 받들고, 풍악산에 와서 사리 여러 과를 얻어 유점사 북쪽 언덕에 묻었다. 선사가 젊었을 때 영관대사의 법을 얻어 종풍을 떨쳤으니, 근대에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제자는 1천여명인데 이름을 떨친 이가 70여인이나 되고, 능히 후학들을 지도하는 한 지방의 종주宗主가 20여인이 넘었으니, 가풍의 융성함이 끝이 없었다.
쌍계사에는 서산대사가 불일암에 머무면서 오갔던 길이 서산대사길이라고 하여 지금도 있다. 서산대사 휴정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 불일암에서 지은 시를 소개한다.
심원화홍우深院花紅⾬
장림죽취연⾧林⽵翠烟
백운응령숙⽩雲凝嶺宿
청학반승면⾭鶴伴僧眠
깊은 선원에는 붉은 꽃잎 흩날리고,
긴 숲에는 비취빛 댓잎이 피어나네.
백운은 산봉우리에 머물러 자고,
청학은 선승과 함께 졸고 있네.
서산대사의 게송은 명랑하고 놀랄만한 구절이 많았고, 필적은 활달하고 굳세고 운치가 있었으며, 행장을 서술함에 또한 이와 같음을 갖추었다. 선사의 환신幻⾝이 이미 재가 되었는데, 직접 경험한 것만 환幻하지 않고 일편석으로 변하였으니, 어찌 몇 장의 글이 선사의 불후한 삶을 나타낼 수 있으리. 그러나 그 도가 너무나 높아 차마 자취를 없어지게 할 수 없기에 길이 세상에 전하고자 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