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판각하여 불법을 홍포한 스님
소요태능스님과 쌍계사 중창
“행장에 따르면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벽암碧巖은 법호다.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海 김⾦씨이고, 그 선조는 사대부였다고 한다. 대사의 아버지가 일찍이 현의 서쪽에 살 만한 곳을 골랐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승려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 조曹씨는 자식이 없었는데 함께 깨끗이 목욕 재계하고 칠성신에게 빌자 오래된 거울을 꿈에서 보고 임신하였다. 대사를 낳으니 만력萬曆 을해년(선조 8, 1575년) 12월 정해丁亥일이었다.
풍채와 기골이 바르고 엄정하였고 눈은 번개처럼 빛났다.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도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잃고서 몸이 매우 여위었다가 겨우 나았다. 복상을 끝낸 후 지나가는 승려를 만나고는 선禪을 배우는데 마음이 기울었다. 이후 어머니와 이별을 하고 점차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마침내 화산華⼭으로 가서 설묵雪默대사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깎고 보정노사寶晶⽼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부휴선수浮休善修대사가 화산에 왔는데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진실한 법을 권면하였다. 곧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俗離⼭으로 들어갔고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을 옮겨 다녔다. 날마다 경전을 보는 것이 이로부터 계속되었고 잠시도 놓지 않았다.
임진년(선조25, 1592년) 난에 송운유정松雲惟政 대사가 관동關東에서 의려군義旅軍을 불러 모았다. 부휴선사에게 가서 묻고는 산에서 적을 피하였는데 반드시 경전을 손에 들고 어려운 곳을 물었다. 계사년(1593년) 송운이 부휴를 조정에 천거하여 격문으로 부르고 위에 아뢰니 대사 또한 칼을 잡았다. 명나라 장수를 따라 바다에서 적을 격파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 매우 칭송하였다.
경자년(1600년)송 칠불난야七佛蘭若에서 하안거를 하였는데 부휴가 병이 들어서 강석을 거두고 대사에게 물려주었다. 대사가 사양하였지만 할 수 없어서 법좌에 올라 토론하니 현묘한 기풍이 크게 떨쳐졌다.
병오년(1606년) 가을 모친상을 당하니 문도 대중을 떠나 속리산 가섭굴迦葉窟에서 재齋를 행하고 복을 빌었다. 남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부휴문하에서 20여 년간 수업하여 입실⼊室제자로 법을 전수 받았다. 계를 실천함에 뛰어났고 인연에 따라 태연하고 담박하였다.
곡기를 끊고도 굶주리지 않았고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으며 옷은 늘 닳고 헤져 있었다. 방장실에 결가부좌를 하니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단이슬 같은 가르침이 골고루 퍼져갔다. 스스로 세개의 잠箴을 지어 문도를 경계하였다.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신비한 구슬이 한번 비추니 고인 물에 빛을 담근다. 화엄華嚴을 엄숙히 외우니 큰 악귀가 퇴각한다. 깨끗한 땅에 썩은 고기를 묻으니 요괴가 단박에 없어진다. 심지어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지켜준 적도 있었고, 따르는 까마귀가 어깨에 모여 들었으며, 닭은 다시 살아나 보답할 줄을 알고, 그물을 태우자 물고기는 감사함을 머금었다. 날고 달리는 동물도 교화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랴!
여러 산사를 창건하고 혹은 중수하였는데, 쌍계사의 동찰東刹, 화엄사의 대대적 중창, 송광사 가람이 그중 큰 것이다. 광해군 때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부휴선사가 요승의 무고를 당하니 대사가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서, 부휴선사를 석방하여 산에 돌아가게 하였고 대사를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 공경과 사대부 여러명이 대사와 친하였는데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얼마 후에는 남쪽으로 돌아가 인조대에 남한산성을 쌓을 때 의논하는 이들이 주상에게 아뢰고 대사를 불러 팔도도총섭⼋道都摠攝으로 삼고 승도를 영솔해서 축성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3년이 지나 공역이 끝났다고 보고 하니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都⼤禪師’의 칭호를 하사하였고 아울러 의발을 내려주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 지리산智異⼭에 머물렀는데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에 행차하였음을 들었다. 이에 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대중을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도 임금의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함을 근본으로 삼음에야! 나라 일이 시급하니 차마 앉아서 관망할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바로 군복을 입고 궐기하였고 격문으로 남녘의 승려들을 불러들이니 달려 온 자가 수천 명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북쪽 길로 가는데 적이 퇴각하였음을 듣고는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쪽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다가 사행이 중도에 이르러 노환이 심해졌기에 간절히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다.
효종은 즉위 전에 편지를 보내고 물건을 보내주었는데 즉위함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으로 총섭摠攝의 직책을 제수하고 적상산⾚裳⼭의 사각史閣을 지키게 하였다. 앉아서 남녘 승려의 기풍을 교화하고 진실한 법을 널리 펼쳤다. 머문지 얼마 안되어 여러 명산을 유력하였는데 부안의 변산을 올려다보고 남해를 굽어본 후 지리산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기해년(1659년) 여름, 효종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피 울었다. 가을인 9월에는 미미한 병세가 있었는데 문도들에게 수업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고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고 하면서 비석은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경자년(현종 1, 1660년) 정월 12일 제자들이 대사가 장차 입적할 것을 알고 게송을 청하였다. 이에 붓을 잡아 손수 쓰기를, “대경⼤經 8만 게송과 염송拈頌 30권이 충분히 자리⾃利와 이타利他의 두 이로움을 갖추었는데 어찌 별도로 게송을 지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상에 몸을 맡긴지 86년, 법납은 72세였다. 함께 받들어서 다비를 행하였는데 삼남三南 온 절의 불제자들이 골짜기를 메웠다.
사리 삼과는 절의 서쪽 기슭 부도에 봉안하였다. 대사가 불교를 계승함은 저 부용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임제臨濟가 남긴 법맥을 접한 것이다. 부휴와 청허휴정淸虛休靜은 모두 영관을 섬겼는데 휴정은 송운松雲에게 전하였고, 부휴는 벽암碧巖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喪儀抄』 1권이 있으며, 제자 중 다수가 현묘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을 열었다.
벽암각성대사의 비문을 지은 이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이다. 그는 비문을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글을 써 줄 것을 청한 이는 율계律戒이다. 내 일찍이 원대한 뜻을 품었는데 벽암이 와서 구례현에서 만나보고 나에게 지팡이를 주었다. 율계가 그를 수행하였는데 실은 수년 전에 율계가 낙하洛下로 나를 방문하였고 지금 스승을 위해서 또 왔으니 참으로 매우 부지런하다. 이런 관계로 비명을 짓는다.
대사의 높은 행실은 부모께 효도함에 근원하였고, 대사가 속세를 버린 것은 대사의 진면목을 얻은 것이다.
지혜의 칼은 의심을 끊었고 깨달음의 터에서 인륜을 높이 숭상하며 자비의 배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배로운 뗏목으로 나루를 건넌다.
수많은 미혹이 단박에 흩어지니 밤에 새벽을 맞는 것과 같도다.
바다에서는 큰 고래가 따르고, 산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복종하며, 물고기는 못에서 즐기고 새는 집에서 따른다.
은혜는 대천세계에 두루 미치고 의리는 시급한 어려움에서 드러난다. 공적은 성채에 있고 도는 산
봉우리 보다 높구나.
자취는 선림禪林에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나라에 있을 뿐이다.
외로운 구름은 머물지 않고 가는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학은 가까이 머물 곳을 잃고 갈매기는 쪼개진 잔에 놀란다.
산천의 색이 변하고 고승은 슬픔을 일으키는데, 절에는 소리가 남아 오히려 구름을 감싸서 돈다.
눈에는 빛이 남아 있고 정신은 함께 없어지지 않았구나.
생각건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예로부터 홀로 푸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