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 선승禪僧으로 쌍계사의 전신인 옥천사를 창건
불교음악인 범패를 최초로 도입하여 불교의식 완성
지리산 옥천사에서 선문禪⾨을 열고 많은 제자 양성
차나무를 화개일대에 번식하여 차문화 발전에 공헌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는 ‘옥천사’를 창건하여 신라 하대 선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분이다. 특히 실천적 수행과 포교활동을 통해 ‘선사사상’을 보급하는데 큰 업적을 세웠고, 우리나라 범패의 선구자로서 숭앙받는 분이다. 선사가 활동했던 시기는 신라 사회가 점차 무너져 가던 하대였다. 신라하대는 무려 20명의 왕이 교체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라사회를 지배해 왔던 골품제의 모순에서 야기된 것이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진감선사는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살다 간 분이다. 하대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와 함께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기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즉 중대까지 융성하던 교학불교는 의상義湘과 그 제자들에 의한 화엄종이 중심이었는데 8세기 중엽부터는 실천보다는 교학적인 경향이 강했다. 9세기 전반 도의道義선사가 당 지장智藏에게서 ‘선’사상을 전해 받고 돌아오면서 바야흐로 신라하대의 ‘선’사상이 보급되었다. 821년(현덕왕 13) 도의선사의 귀국은 신라불교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선사의 사상과 활동은 교학불교로 일관하였던 당시 불교계에 이단으로 보였고, 또 국가적으로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선’사상은 시대의 조류였고, 역사의 한 흐름이었다. 도의선사의 뒤를 이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홍척선사에 의해 ‘선’사상은 꽃을 피우게 되었다. 흥척선사는 홍덕왕의 지지를 받으며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신라사회에 ‘선’사상을 본격적으로 전하는데 기여하였다.
선종의 전래는 기존의 중앙중심이고 귀족중심이던 교학불교에서 벗어나 불교를 지방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선종의 교화방법이 문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수심修⼼에 의한 직관위주의 실천절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마음만 잘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법의 해석은 지방호족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또한 소의경전에 의존하기보다는 심전⼼傳에 의해 불법을 전수하며 누구나 직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선’사상이 확산되면서 기존의 교종을 대표하던 화엄종은 새로운 도전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선·교의 갈등은 하대불교의 또 다른 발전상을 전개시켰고, 이 둘은 갈등속에서 공존하였지만 10세기에 이르면 선종의 위세가 불교계를 이끌어간 중추세력이 되었다. 즉 9세기 중반 이후 국가에서 책봉한 국사는 모두 선승이었던 것이다. 당시 선승의 대표적 인물은 무염선사였다. 선사의 명성은 온 나라에 널리 퍼져 귀족들은 스님의 선문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신라 지방호족의 열렬한 지지에 의해 선종은 확산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사상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지방호족의 이데올로기적 배경이 되었다는 지나친 정치적 평가는 옳지 않다. 선종은 지방호족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다양한 산문의 개창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선종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도의와 무염, 그리고 혜송 등의 선사들은 교종의 지나친 관념화에 새로운 실천적 불교사상을 전개展開 하면서 신라사회와 불교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혜소선사는 신라말의 선승禪僧으로서 시호諡號는 진감眞鑑이다. 선사상禪思想을 신라사회에 전파하였으며 옥천사⽟泉寺(현 쌍계사)를 창건創建하여 신라하대 선불교의 융성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선승이었다.
선사에 관한 기록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영탑’비문이 유일한데 이것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혜소의 선조는 산동지방의 한족漢族으로 수隋와 고구려의 전쟁 시 고구려에 항복하여 고구려민이 되었다가 신라 통일기에 이르러 금마⾦⾺,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정착한 유민이었다. 이를 통해 볼 때 혜소선사는 고구려계 유민의 후손으로 생각되며 ‘최씨’라는 성을 사용한 점에서 신라 6두품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중앙에 기반을 둔 계층이라기 보다는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이러한 점은 신라하대의 선종이 지방세력과 밀착되었던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선사의 아버지인 창원昌元은 독실한 불교도로 재가신도이면서도 출가승과 같이 수행하였다. 어머니 고씨가 어느날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이르고 나서 유리 항아리를 주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사가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도인 동시에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던 금마지역의 고구려계 유민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출가승과 같이 수행할 정도의 지식을 갖춘 계층의 후손이었으며, 이와 같은 학문적 바탕을 통해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혜소는 아이들과 놀 때에 나뭇잎으로 향을 삼아 사르고 꽃을 따서 공양을 올리는 등 어려서부터 독실한 불교도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불교도였던 그였지만 비교적 늦은 31세의 나이로 출가하게 된다. 그의 출가가 이렇게 늦어진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집에 한 톨의 곡식도 없고 한 자의 땅도 없어, 생선장사를 통해 부모를 봉양하는 등 매우 어려운 생활고를 겪게 되어,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불법을 구할 뜻을 세웠던 것이다. 최고 6두품까지 상정할 수 있을 그의 출생신분을 생각할 때 그의 곤궁은 의외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의 유풍遺⾵이 강하게 남아있던 금마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 과 당시 구 백제계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상항이었음을 감안할 때, 중앙으로부터의 감시와 고구려계라는 불리한 성분이 이러한 곤궁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며, 이 때문에 부모를 봉양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불법에 귀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의 출가가 31세라는 늦은 나이였던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 이후, 혜소는 804(애장왕 5)년에 세공사歳貢使의 배를 타고 당나라 창주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師를 친견했다. 몸을 던져 절하고 반쯤 일어서려는 순간 대사가 반가워하면서, ”반갑다. 이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기쁘게 다시 서로 만났구나.”라고 하고는 곧바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하였다.
신감은 마조 도일의 제자로 남종선南宗禪의 선사였다. 따라서 혜소는 신감의 문하에서 ‘선’사상을 수용하고 습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날로 정진하여 신감의 제자들로부터 동방의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또한 대중들에게도 얼굴이 검지만 뛰어난 도가 있다고 하여, 중국불교 흥기의 발판을 마련한 도안道安법사의 별명과 같은 흑두타⿊頭陀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혜소는 810년(헌덕왕2) 당나라 숭산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더욱 정진하게 된다. 숭산 소림사의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가 전에 꾼 꿈과 완전히 부합하였다. 계를 받고 나서 다시 학사로 돌아가 경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꼭두서니보다 붉고 남빛보다 푸르러 가르쳐 준 스승보다 나았다.
당시 소림사는 많은 선사들이 참례하는 장소로서 그곳에서 혜소는 상당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소림사가 북종선北宗禅과 남종선南宗禅을 모두 수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곳에서의 수행으로 혜소는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계를 받은 후 그는 다시 교학연구에 매진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각지를 유람하며 묻고 배우며 도를 구했다. 그는 선수행과 교학연구의 실천적 겸수兼修를 시도하여 걸식수행인 두타행頭陀⾏을 통해 직접적으로 실천하는 선수행의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혜소는 그보다 앞서 당나라에 갔던 신라 선종의 초전자初傳者인 도의道義선사를 만나 함께 편력하면서 부처님의 지혜를 탐구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혜소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많은 불교사상을 접하였고, ‘선’사상을 독자적으로 체득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도의가 먼저 귀국하자, 혜소는 종남산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며 고요히 참선하였고, 그 뒤에는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동안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이러한 과정들 역시 혜소가 실천적 ‘선’수행을 통해 독자적 ‘선’사상을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고행을 통해 실천적 불교사상을 체득한 그는 830(흥덕왕 5)년에 귀국하여 국왕의 환대를 받으며 상주 장백사⾧栢寺에 주석하게 된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는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는 흑의이걸⿊⾐⼆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누더기 입은 뛰어난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라가 기쁘게 기대하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겠다”고 하였다.
수행을 중심으로 했던 중국에서와는 달리 혜소는 귀국한 뒤 아직 선사상이 자리잡지 못한 신라사회에 선사상을 소개하고 확대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보다 먼저 신라에 귀국한 도의가 교종중심의 불교계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북산北⼭에 은거하였던 것과는 달리 혜소는 흥덕왕의 환대 속에서 선사상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던 것이다. 도의국사의 경우와 같이 초기의 선사들은 왕실이나 귀족계층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의보다 9년 늦게 귀국한 혜소는 흥덕왕의 귀의를 받으며 왕실과 관련된 선종 사원인 장백사에 주석하게 된다. 이것은 교종에 의해 주도되던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그들과 결탁한 진골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왕실의 의도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교종의 교세가 드높던 불교계의 상황 속에서 흥덕왕의 죽음 이후 혜소는 많은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뒤에 혜소선사는 지리산 화개곡으로 옮겨 삼법화상三法和尙이 개산開⼭한 옛 절터에 새로 절을 짓고 머물렀다. 이후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838년 민애왕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에게 “부지런히 선정善政에 힘쓰는데 있는 것이지, 어찌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만남을 거절하였다. 이에 왕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신을 보내 선사에게 ‘혜조慧照’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뒤에 소성왕의 이름을 피해 조照를 소昭로 고쳐 혜소라 하였다. 또한 황룡사의 승적에 올리고 서울(현 경주)에 와서 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 절이 비좁게 되자, 다시 화개의 남쪽 기슭에 옥천사(현 지리산 쌍계사)를 짓고, 조계曹溪의 현손으로서 혜능慧能조사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선사는 교세의 확장과 문도의 증가에 힘입어 쌍계산문을 개창하게 된다. 그의 대중교화에 대한 부단한 노력과 검소한 실질위주의 생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남종선의 소개와 확산에 노력하던 혜소는 이를 위해 옥천사와 영당을 건립한 것이다. 영당의 건립을 통하여 혜소는 신라하대의 선종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의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진감선사 혜소는 심법⼼法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즉 전하지 않으면서도 전해지는 남종선 사상이었다. 전하지 않았으나 전해지고, 말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 새겨지게 하는 혜소의 선종 사상은 달을 가리키는 비유로 곧잘 설명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달은 물론 가리키는 손가락마저도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듯 혜소는 기본적으로 강한 조사선 사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서 불성을 찾아 깨치려는 조사선 사상은 생활 자체를 스스로 꾸려 가는 실천 수행을 강조하였다. 신도들이 거친 음식을 공양하게 되어 곤란해 하자, 진감선사 혜소는 “마음이 여기에 왔으니 거친 밥인들 상관없다.”고 말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그는 아이들이나 어른은 물론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였다. 이같이 그의 조사선사상 속에 일심이 강조되어 자리하는 모습은 북종선도 함께 융섭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혜소의 남종선 사상은 북종선 사상을 포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강조되었다.
진감선사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소리로써 교화하였고, 사회의 여러 계급에까지 널리 보급하고 조직화를 하였다. 이후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선사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신라 말기 선종이 염불사상을 수용한 것도 범패와 큰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범패는 신라 선종계는 물론 한국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진감선사는 또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으며, 이로써 쌍계사는 차나무시배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진감선사는 의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서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진감선사 혜소는 입적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만법이 모두 공空하니 나는 장차 떠나려 한다. 너희들은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힘써 노력하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공관을 추구하면서도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노력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혜소선사는 850년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고, 문성왕이 시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탑비를 세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만두었다. 이후 헌강왕惠康王에 이르러 진감이라 시호하고. 탑호를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碑라 하였다. 헌강왕이 중도에 승하하자 정강왕이 이를 계승하면서 양쪽 계곡의 시냇물이 합쳐 흐른다고 하여 옥천사에 “쌍계사”란 이름을 내렸다. 탑비는 887년 7월에 세워졌는데, 이 달에 정강왕이 승하하였다. 신라 후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었으며, 글씨도 직접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