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불교

중도(中道)의 길을 가기

ssanggyesa
2010-12-15 12:39
작성자
ssanggy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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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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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중생심의 병리를 불심의 생리로 돌리게 하는 처방
 
 동서양의 현자들은 대부분 중도나 중용을 지혜의 자리로 보았다. 물론 부처님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덕적 덕성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중간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천명하였다. 예컨대 용기의 덕은 모자람의 극단인 비겁함과 지나침의 극단인 무모함과의 사이에 있고, 절제의 덕도 지나침의 극단인 방탕함과 모자람의 극단인 과도한 금욕과의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 즉 중용의 덕은 감정의 양극단적 기질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균형유지를 위하여 그는 이성적 판단을 유일한 잣대로 생각했다. 그 이후로 서양의 철학사는 거의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추종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용, 양극단적 기질서 균형 유지



 동양사상에서도 이 중용의 의미를 특히 강조한 성인이 공자다. 공자가 언급한 ‘과유불급’(過猶不及=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황금의 중용사상과 일치한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중용》에서 공자의 말씀을 전하면서, 순임금의 큰 지혜는 “양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쓴 것”에서 왔다고 술회하였다. 이런 중용을 생활화하는 길로서 자사는 자연과 달리 인간은 ‘선을 선택해서 굳세게 잡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또 ‘만사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고, 돈독히 행하는’ 길을 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자사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의 판단력을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위의 구절을 음미하면 역시 인간이 중용을 실천하기 위하여 양극단을 잘 가려서 이성적 판단력으로 그 가운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선지후행(先知後行=먼저 판단하고 나서 행동함)의 중용사상에 공통적인 사고방식이 또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양극단을 마음의 바깥에 분리 인정하고, 그 양극단의 중간에서 판단하여 행동하는 중용의 객관적 표준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병 원인은 정상의 과잉과 과소



 그런데 최근에 의학과 철학의 두 영역이 혼융된 의학철학이 서양에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20세기 프랑스의 의학철학자인 다고녜와 깡길렘을 잠시 언급하련다. 깡길렘은 병을 정상의 부재나 고장으로 해석하기보다, 오히려 정상의 과잉(hyper)과 과소(hypo)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생리현상의 과도나 과소가 병을 낳으므로 생리와 병리가 별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바셰도우병은 호르몬의 과다분비에서 생기고, 당뇨병은 호르몬의 과소분비에서 온다. 산소결핍은 가사상태를 초래하고, 반면에 산소과잉은 폐를 흥분시켜 내장염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산소는 약이고 동시에 독이다. 약과 독을 별도로 분리시켜 보는 이분법이 아니고, 약이 동시에 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고녜는 약과 독을 별도로 물신화해서는 안 되고, 약은 이미 독을 머금고 있다는 것이다. 의학철학의 관점에서 외곬으로 병의 치료를 주장하는 사고방식은 직통으로 병균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사고방식처럼 병의 악화를 초래한단다. 독사의 해독제는 바로 독사의 독 속에 이미 동봉되어 있다. 이들의 의학철학에 따르면, 치료는 생리의 절대적 기준을 따르는 ‘최고의 논리’(the logic of maximum)가 아니고, 생리가 치우쳐 병리로 나아가는 것을 예방하는 ‘최적의 논리’(the logic of optimum)을 추구함과 같다.



치료는 ‘최적의 논리’ 추구



 이런 의학철학의 담론이 매우 유익하다. 과잉과 과소의 양극단이 바깥에 실체적으로 분리되어 이분법적으로 놓여있고, 그 다음에 중용의 중간(善)위치가 그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저 담론이 부정하기 때문이다. 병리는 생리와 별개의 것으로 실재하지 않고, 생리의 과소와 과도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불심과 중생심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이원화되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의 사고방식에 따라 불심이 되기도 하고 중생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불심으로서의 정상적인 생리의 과도나 과소가 중생심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심은 과도나 과소의 양극단으로 변한 중생심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고 실체론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실체론적 중간 입장의 태도는 흔히 중도의 이름으로 어중간하게 자리잡는 정치적 기회주의자의 처신과 별로 다르지 않다. 불심과 중생심은 같은 마음의 사고방식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겠다. 불교의 마음은 정신(spirituality)과 같은 뜻이 아니고, 사고방식(mentality)과 같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점은 다음에 다시 언급될 것이다. 하여튼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중도의 길은 마음의 어떤 사고방식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다고녜와 깡길렘의 의학철학적 치유론은 불교적 중도의 사고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 치유론은 앞에서 거론된 아리스토텔레스와 자사의 중용론과 좀 다르다. 이들의 중용론은 지나침과 모자람이 먼저 악덕으로서 의식 앞에 서 있고, 의식이 이성적 판단에 의하여 중간의 위치를 선으로 선택한다고 말한다. 양극단은 악(병)이고 중간의 중용은 선(건강)이라는 생각을 이들은 견지하고 있다. 이들의 중용사상이 수학적 중간치가 아니라, 가장 적중한 상황의 선택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의 중용을 악의 양극단과 대결시킨 점에서 그것은 양극단의 사이 어디엔가 실재론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 의학적 치유론에서 보면, 중용(건강)의 생리가 양극단의 병리와 별개의 것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즉 과다·과소와 별도로 중도가 실존하지 않고, 저들과 함께 동시적으로 중도(건강)의 생리가 혼융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심이 중생심과 혼융되어 존재한다는 이치와 유사하다.


불심·중생심 이원화돼 실재 않는다



 선의 중용과 악의 양극단이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경우에, 선의 중용은 악의 극단을 배제하고 제거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리즉병리(生理卽病理), 불심즉중생심(佛心卽衆生心)을 생각하는 경우에, 생리와 불심이 병리와 중생심을 제거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같은 마음과 몸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르몬의 과도분비와, 과소분비가 각각 병을 초래하지만, 그렇다고 호르몬의 생리작용을 없애는 것은 건강의 근본터전을 파괴하는 셈이다. 의학적 치유는 선이 악을 소멸시키는 정공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의 자기고집과 배타성은 악이 유효한 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척결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고녜가 말했다. “적을 박멸함은 그 적이 저장하고 있던 독을 흩뿌리게 하는 것과 같다. 가끔 악의 소멸로서의 선은 재앙으로 발전한다.” 불교의 중도사상은 대단히 의학적인 치유의 의미와 철학적으로 유사하다. 불교의 중도사상은 중생심의 병리를 불심의 생리로 돌리게 하는 처방과 같다. 우리는 중생이 된 부처로 실존한다. 이 말은 심신이 아픈 부처로 실존한다는 것과 같다. 중생으로서 병이 없는 100%의 부처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 중생의 병이 심신적으로 바로 지나침과 모자람의 양극단에서 헤매는 것이다. 중생이 헤매고 있는 이 양극단은 결코 부처로 되돌아가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생의 병리가 부처의 생리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그 병리를 박멸하려고 애쓰지 말고, 중생의 양극단을 보는 사고방식을 익혀야 한다.



양극단, 중생심의 동시적 두 모습



 그 사고방식이 곧 이중긍정의 사고방식이다. 양극단은 중생심의 동시적 두 모습이라고 읽어야 한다. 어느 일방이 없으면 타방도 일어나지 않고, 그 일방이 사라지면 타방도 따라서 소멸된다는 그런 양가적 이중긍정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먼저 익혀야 한다. 중생의 모든 사고방식은 언제나 연기법적인 이중성의 구조로서 작용하기에 내가 남자지만 여자적인 요소를 머금고 있고, 이것이 약이지만 독의 요인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고, 선과 진리도 그렇다고 외곬의 고집을 피우면 악과 반진리로 둔갑하고, 과잉과 과소도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친다. 중생은 필연적으로 양극단을 머금고 있으므로, 중생은 결코 자기 생각을 선과 진리와 약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자기생각은 무의식중에 반작용을 반드시 낳기 때문이다. 이중긍정은 작용과 반작용이 늘 동시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고방식이다. 그런 한에서 이중긍정은 양극단의 존재가 자기동일성이 없이 각각 상대방이 있기에 생기는 의타기적(依他起的=상호의존적으로 생기는) 반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중긍정은 다 자기 것이 없는 상대방의 반작용과 그 흔적에 불과하다. 이 이중긍정은 중생이 자기 마음의 양극단적인 병을 실체가 없는 환영(幻影=그림자)이라고 볼 때에 일어난다. 이런 사고방식이 중생의 병리를 부처의 생리로 돌리는 시작이다.

 이중긍정은 결국 이중부정의 사고방식을 이면에 은적(隱迹=감추고 있음)시키고 있다. 이중부정은 작용과 반작용이 다 동시에 자기동일적 자가성(自家性)이 없다고 보기에 이중긍정이 곧 이중부정과 다르지 않다. 이중긍정은 양극단을 가진 중생심이 불심으로 바뀌게 하는 현상적 시각(始覺=생멸심 속의 깨달음)의 사고방식이고, 이중부정은 중생심을 여읜 불심의 본질적 본각(本覺=진여심 속의 깨달음)에 해당한다 하겠다. 생멸심의 연기(緣起)가 진여심의 공(空)과 다르지 않다.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밝힌 팔불(八不=不生不滅/不常不斷/不一不異/不來不出)의 사고방식이 바로 중도의 길이다. 중도는 공사상과 같다. 중도즉공 사상은 중용처럼 인간학적이고 도덕적인 덕성의 취득이 아니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본래의 건강으로 복원시키기 위한 비(非)소유론적 사고방식과 존재론적 사고방식의 길을 밝힌 것이다. 이중긍정은 비소유론적 사고방식으로서 양극단의 집착을 벗어나는 일차적 길이고, 이중부정은 보다 적극적인 존재론적 사고방식으로 일체 존재를 딱딱한 고체처럼 보지 않고 바다의 물로 보는 사고방식으로서의 이차적인 길이다. 바닷물은 한 맛이면서 수만 개의 빗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 다시 또 모이고 흩어진다.

<김형효>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