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칡꽃,쌍계사-법정스님
이번 가을에는 지리산을 오르리라 벌써부터 생각은 심어두었지만 미적미적 미루어오던 차에 갑자기 길 떠날 시절 인연이 생겼다. 서울에서 산행 차림을 하고 길벗 두 사람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는 격으로 산행을 겸한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잘 아시다시피 지리산은 전남 전북 경남의 3도와 5개 군을 끼고 그 둘레가 무려 8백 리에 뻗쳐있다. 주봉인 천왕봉이 해발 1,915미터, 반야봉이 1,751미터나 솟았고,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와 함께 능선이 유장하고 계곡이 깊은 남한의 명산이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30리 길이 산길치고는 너무 단조로웠던 이전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번에는 천은사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40리 길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냇물과 숲과 바위가 천연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름이 좀 있는 산이라면 하나같이 작전 도로가 뚫려 산을 버려놓았는데, 이곳도 노고단 까지 그런 길이 있어 분단 조국의 비애를 오장육부로 느끼게 한다.
산마루에서 올라오던 길을 되돌아보노라면 새삼스레 인생이 무엇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젖빛 운해에 덮인 저 아래 사람이 사는 동네들. 그 안에서 우리들은 희로애락을 마련하면서 살고 있다. 시시콜콜한 일상성에 집착하여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또는 보다 많이 차지하려고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이런 것이 인간의 살림살이다.
그러나 오늘 산정은 쾌청! 수백 리 밖까지 내다보이는 아득한 맷부리들. 아 저게 바로 우리들이 지나온 허구한 세월이요, 기구한 역사가 아닐까
노고단 산장에는 산사나이 함태식 씨가 5년 전과 다름없이 정정한 모습이다. 천은사 약사암에서 싸준 도시락을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산 냄새나는 풋풋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상의 가을은 눈이 부시다. 커피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린다. 자연이 내린 고마운 은혜다.
노고단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20여 리 능선길은 몇 번을 다녀봐도 한결같이 정다운 코스이다. 울창한 굴참나무 숲을 지나면 무더기무더기 철쭉밭, 허옇게 억새꽃이 핀 갈밭길, 전나무와 헛갈리기 쉬운 구상나무 등. 좌우로 트인 산정의 시원한 조망은 걸을수록 힘이 솟는다. 임걸령에서 삼거리를 지나 연곡사까지의 계곡을 `피아골`이라 하는데, 자꾸만 발길을 멈추게 하는 단풍의 장관이 아니라면 어지간히 지루할 뻔했다.
길가에 초라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연곡사. 고려시대의 정교한 부도가 없었다면 절터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버스로 한참 내려오면 섬진강이 흐른다. 강물을 따라 5리 지점이 화개장터. 벚꽃나무가 늘어선 10리 길을 올라가면 쌍계사 동구다.
25년 전 이 길을 오르내리며 입산 출가의 의지를 다지던 기억들. 무서움을 잘 타 밤에 변소길도 혼자서 못 가던 겁쟁이가 이 길에서 그 무서움을 떨쳐버렸었다. 최초의 탁발길에 오른 것도 바로 이 길을 지나서였다. 구례장을 보아 오느라고 한겨울 트럭위에서 섬진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귓가에 쐬던 것도 바로 이 길이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아무도 없다. 적어도 쌍계사 경내에는 넋이 되어 나 혼자서 찾아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삼신산 쌍계사`라고 쓴 일주문의 낯익은 편액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삼신산은 원래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 영주(한라산)를 가리킨 것인데, 지리산에 많은 절이 있어서 쌍계사만은 달리 삼신산이라 한 것이다.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괄괄한 성미와 관련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쌍계사는 723년 의상 대사의 제자 삼법과 대비 스님이 법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다가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머리)을 모셔와 지금 금당 자리에 봉안함으로써 창건된 셈이다. 9세기 신라 헌강왕이 그 덕을 우러러 받들던 진감선사때 크게 번창하고, 1641년 벽암 선사가 대대적으로 복원, 그 후 성총 스님이 중수를 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지리산 화개곡 눈 속에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대사의 정상을 모시라는 현몽을 얻어 탑을 세우고 금당을 지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육조의 정상을 모신 이래 이곳은 우리나라 조계선풍의 정신적인 근거지가 된 것이다. 조계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던 산 이름이다.
예전부터 남쪽의 선원으로는 칠불암의 아자방과 함께 이곳 탑전 좌우로 있던 동,서 방장선원을 꼽았엇다. 필자가 은사 효봉선사를 모시고 안거 정진하던 곳이 바로 이곳 서방장이었다. 그때 동방장은 빈방으로 있었다.
대웅전 앞에 ‘진감 선사 대공탑비(국보 47호)’가 있는데 왕명으로 최치원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진감 선사의 전기 비다. 1천여년이 지났는데도 칠분 해서체로 쓴 그 자획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우리 나라 금석문 중에서도 으뜸이 될 만하다. 이 비문을 보면 쌍계사가 우리 범패는의 본고장임을 알 수 있다.
“그윽한 범패는 그 소리가 금옥 같고, 맑은 가락 또한 상쾌하고 구슬퍼서 능히 제천을 기쁘게 하고 먼 곳에까지 유전되었다....”
20여 년 전 범해스님 때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지만 오늘은 희미한 그림자만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육조 정상을 당나라로부터 모시고 올 때 차의 씨도 함께 가져와 오늘날까지 지리산 작설차의 산지로 되어 있다.
5년 전 이곳을 찿아왔을 때, 금당만 덩그러니 남은채 동,서방장이 허물어진 걸 보고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든 옛집이 허물어져 없어진 걸 보니 맑게 간직한 추억의 뜰이 산산히 흩어졌다.
사연인즉, 못된 사이비 수좌들이 드나들며 정진은 하지않고 주지에게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그때의 주지가 동방장, 서방장을 뜯어다가 주지실을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가람을 수호하고 삼보를 보호해야 할 주지가 몇몇 떠돌이 중들 꼴을 보기 싫다고 유서 깊은 선원을 허물며 자신의 거실을 만들었다니, 그 공과는 염라대왕이 알아서 조처하겠지만 박복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흔미의 단면은 이런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 무렵 퇴락할 대로 퇴락하여 음산하기까지 하던 절간을 보고 섭섭하기 그지없었는데 오늘 와 다시 보니 쌍계사는 새 면목으로 일신되었다. 4년 전 고산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래 큰 원을 세우고 쌍계사 중창 불사에 전념한 결과다. 다 허물어져 가던 불전과 요사들이 산뜻하게 보수되었다. 적묵당 설선당이 번듯하게 고쳐지고 기울어가던 팔영루도 이제는 튼튼하게 세워졌다.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들도 말끔히 손질되어 산문에 들어서면 온 도량에 서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경내에 우람하게 서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를 대하니 지금은 고인이 돼버린 고승당과 국사암의 노스님들 모습이 떠오른다. 역시 인걸은 간 데 없구나. 주지 스님의 중창 불사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날 동,서방장에서는 다시 입방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들릴 것이고. 강당에서는 이 시대가 바라는 든든한 학승들이 배출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다시 눈 속에서 칡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리라. (1980) 법정스님 수필집 ‘산방한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