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전에 모셔져 있던 쌍계사에 주석한 고승들의 진영이다.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
호는 부용芙蓉 또는 은암隱庵이며, 별호는 연선도인蓮船道⼈이다. 속명은 구언九彦으로 지금의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1498년 출가하여 덕이산 고행에게 3년 동안 배운 뒤 스님이 되었다. 신청에게 교리를, 위봉에게 선리를 배웠으며, 덕유산 구천동에 암자를 짓고 9년간 수도하였다. 1509년(중종 4) 용문산에 들어가 조우祖愚와 선문답을 나눴으며, 1514년에는 청평산의 학매學梅로부터 불도의묘법을 얻었다. 1530년(중종25) 지리산에서 만난 지엄으로부터 보우普愚 법통을 계승하였다. 3년 동안 지엄을 모시다가 운수승으로 나서 40여년간 전국을 순례하였다. 1571년 고성의 연곡사에서 나이 87세, 법랍 73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전법제자인 휴정休靜과 부휴·선수·법융·영응·정원·신옹 등이 있다.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
스님은 1609년(광해군 1)에 절의 네 번째 중창을 이룩하여 600여 명의 대중이 동안거를 지낼 정도의 대가람을 완성한 분이다.
스님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20세에 지리산의 신명信明 스님에게 출가하고 뒤에 부용영관의 법을 이었다. 사상을 구별하지 않고 많은 유교서적을 읽어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탁월한 필치도 겸비하였다고 한다.
명성이 세상에 드날리자 당시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함께 2난⼆難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 때는 명나라 장군 이종성李宗城을 만났는데, 그가 스님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는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609년 송광사의 청을 받은 스님은 제자 벽암각성 등 4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절을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이후 스님은 지리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무고를 입어 벽암각성과 함께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덕과 교화를 알아본 국왕은 오히려 상을 내렸고, 감옥에 있을 때는 관리들이 스님을 대불⼤佛, 벽암을 소불⼩佛이라 칭하기도 했다.
한편 봉인사奉印寺에서 법문을 펼칠 때는 그를 보려고 몰려 든 사람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스님의 명성은 자자했다.
1615년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나이 73세, 법랍 54년으로 입적하니 나라에서 홍각등계弘覺登階라는 시호를 내렸다.
스님의 부도는 송광사를 비롯해서 해인사·칠불암·백장사 등에 세워졌고, 문하로는 벽암각성을 비롯한 700명이 있었다. 이들이 후에 스님이 지은 각종 시·기문을 모아 <부휴당집>을 엮었다.
응암학성應庵學性(1830~1866)
법명은 학성이고 법호는 응암이며 성은 김씨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자행책활慈⾏策活선사 문하에서 스님이 되었다. 뒷날 서주의 첨犀⾈懿沾 스님을 계사로하여 열린 수계식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은사인 자행 스님 조실에 들어가 향불을 지피고 법맥을 이었으며 범해각안梵海覺岸스님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여 모든것을 법도대로 행했고 아랫사람에게는 어진마음으로 대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응암 스님은 조선 순조 30년(1830)에 태어나 고종 23년(1866) 3월 15일 두륜산내 청신암에서 입적하니 나이 57세요, 승납 40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