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기문

쌍계조탑 해동복전[雙磎造塔 海東福田]-이능화

최고관리자
2010-07-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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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 육조정상탑.jpg

쌍계조탑 해동복전
雙磎造塔 海東福田

조계사문 惠勤의 호는 猊雲散人으로, 신라문창후 최치원의 후손이다. 집안은 대대로
호남에서 살았으며, 조계산 仙巖寺에서 발심하여 景䳟(법명 益運)대사의 밑에서 공부
하였다. 불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속전에도 익숙하였으며, 僧史에 빛날 인물이 그의 문하
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니, 참으로 윗대에 부끄러울 바가 없었다. 지난해에 지리산 쌍계
사 육조정상탑의 放光論을 써서[海東佛報]에 게재하였으므로 지금 간략히 그 글을 기록
한다.


     六祖頂相塔 放光論 참조

尙玄이 말하기를
쌍계사를 상고하면 지리산의 화개곡에 있으니, 골짜기 속에 눈이 내릴 때도 칡꽃이
만발하는 땅으로, 오대산의 적멸보궁(佛頂을 봉안한곳)과 가히 그윽함을 비교할 만하
고, 태백의 葛來塔(수마노탑에 불사리를 봉안)보다 경치가 못함이 없도다. 신라의 삼법
화상이 난야를 창건하고 탑에 육조정상을 받들어 봉안하였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진감
국사가 남은 터에 옥천사를 창건하고(신라 헌강왕이 쌍계사라 사액함)六祖景堂을 세웠
다. 이와 같이 정상을 봉안함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기 마련이지만, 최고운의 비에서 명
확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대개 감추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육조께서 임종하실
때 東人이 머리를 취한다고 예언하였으니, 이는 바다 동쪽인 우리나라에 돌아가 머물게
됨을 지적한 것이요. 돌아갈 곳을 지리산으로 지적하였으니 지리산이 인연이 있는 땅임
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 !지리산의 쌍계사는 실로 우리나라의 福田이다. 무릇 쌍계사
에는 앞에 진감국사가 있고 뒤에 고운선생이 있어 雙絶을 이루었으니, 비단에 꽃을 더한
것과 같고 빛나는 산에 아름다운 시냇물이 흐르는 것과 같도다.
西山大師의[지리산 쌍계사 중창기]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智異山 雙谿寺 重創記 참조

[擇里志]에 이르기를
고려말 韓惟漢이 식구들을 거느리고 岳陽洞에 은거함에 조정에서 찾아와 벼슬을 임
명하고 불렀으나, 유한이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신선
이 되었다고도 한다. 쌍계사에 최고운의 畵像이 있다. 계곡의 석벽에 고운이 새긴 글이
많으며, 세상에서는 최고운이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선조 신묘년(1591)
에 寺僧이 바위 위에서 종이를 주웠는데, 十首의 뛰어난 시가 적혀 있었다.

  첫 번째 詩
우리나라 화개동에는
병 속의 별유천지가 있도다
선인의 玉枕을 베고 누우니
잠깐동안에 천년이 지나가네

(종이에 쓴 글은) 고운의 書法과도 같았다. 산중에는 萬壽洞 · 靑鶴洞이 있는데, 만수
동은 지금의 九品臺요 청학동은 지금의 梅溪이다.

  십절구 중 二首

明月이 처음 생겨난 그곳
靑風은 움직이지 않는 시절에
두견새 소리가 들려오나니
그윽한 흥은 스스로 알리라

  第三首
일만 골짜기에 우뢰소리 일어나니
千峰의 비가 산색을 새롭게 하네
산에 사는 스님은 세월을 잊어
새 잎이 돋는 봄만을 기억하네

  第四首
달빛이 쌍계의 물을 밝게 비추고
淸風은 팔영루에 불어오네
옛날 나그네가 머물렀던 곳에서
그대와 노닐며 오늘을 보내노라

  『輿地勝覽』중 최치원이 쌍계사에 있을 때 顥源上人에게 보낸 시
종일토록 머리 숙여 글을 썼건만
속마음 말하기 어려워 입을 다물었네
속세와 멀리 떨어져 기쁘게 지낸다 하나
風情이 무르익지 않으니 어찌하랴
맑은 노을 단풍길에 사람들이 오가니
밤비와 구름사이로 말소리 이어지네
경치 보며 시 읊으니 구애됨이 없으며
四海心이 깊어질수록 도는 평안하도다

상현이 또 이르기를
운상의 칠불암과 화개의 쌍계사는 곧 부처님의 靈山寶林이며 仙家의 洞天福地로다(운
상원은 지금의 칠불암으로, 동국제일선원이라는 편액이 있다. 화개곡에는 신라 國仙 永
郞이 와서 노닐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