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기문

최치원이 진감선사를 기린 쌍계사-조동일 교수

ssanggyesa
2010-07-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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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anggy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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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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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 하는가 

  지리산 쌍계사雙磎寺로 가려면 화개花開를 거친다. 섬진강가의 마을에서 경상도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만난다. 주위를 돌아보면 강가의 평야와 뒤를 두른 산이 어우러져 경치가 빼어나다. 조금 내려가면 강과 바다가 겹친다. 그 일대는 온통 만남의 장소이다.
  화개 마을에는 꽃이 많다. 벚꽃이 골짜기를 다 덮는 철이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절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쌍계雙磎 ’라고 커다랗게 새겨놓은 돌이 있다. ‘계磎 ’는 돌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뜻하는 말이다. 두 개울이 만나 쌍을 이룬다는 말로 흐르는 개울을 뜻하는 말로  절 이름을 삼았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만나서 쌍을 이룬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절에 이르면, 더 큰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라는 돌비가 절 마당에 서서 방문객을 맞이한다. 파손된 곳이 있고 보호가 필요해 쇠테를 두르기는 했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단아하면서도 생동하는 필체로 촘촘히 박아 쓴 많은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있다.
  천 년 이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우리를 꾸짖는다. 얼마 되지 않는 글자를 기계로 판 오늘날의 비문은 쉽게 망가지는데, 신라 시대의 선인들은 놀랄 만한 장문을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손으로 새겨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못난 후손에게 보여주고 있다. 비의 주인공 진감과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최치원崔致遠의 만남에 누구나 동참할 수 있게 한다.
  호가 진감이고 법명이 혜소慧昭인 고승은 804년에 당나라에 갔다가 830년에 귀국해 쌍계사에서 선종을 일으키다가 8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최치원은 868년에 당나라에 가서 874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다가 885년에 돌아왔다. 887년에 왕명을 받아 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썼다. 불교 관계 비문 넷,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첫 작품이다. 2천 500여 자나 되지만 다른 세 비석보다는 분량이 적으며, 수식은 덜하고 내용이 알찬 편이다. 

진감의 불교와 최치원의 유교

  진감과 최치원은 8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어 직접 만나지 못했다. 신라 말에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최고 지식인인 점이 같으면서도, 불문의 승려와 세속의 문인은 격이 달라 상당히 다른 대접을 받았다. 널리 숭앙 받던 진감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국가에서 계속 받들어 모셨다. 최치원은 글 쓰는 직분을 맡았는데 기대하던 지위는 아니었다.
  비문 말미에서 최치원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했다. 비문을 지으라는 왕명을 받고 물러나 생각해 보니, 도달한 경지가 많이 모자란다. 아름다운 글이나 쓰려고 하고 성인의 도리에는 이르지 못해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진감이 보여준 불교의 이치는 글로 나타낼 수 없어, “기어이 말 하려고 하면 수레 채를 북으로 두고 남쪽 초나라로 가려는 셈이다.”라고 했다. 자기 능력이 이처럼 모자란다고 하면서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최치원은 글 쓰고 문장 다듬는 능력이 뛰어나 당나라에서 이름을 얻고,귀국해서도 관직에 참여하고 일거리를 얻었다. 말을 골라 짝을 맞추고 아름답게 수식하면서 오묘한 표현을 아로새기는 재주를 기회 있을 때마다 마음껏 자랑했다. 한문 실력이 더 나아졌다는 후대의 대가들마저 읽기 어렵다고 하는 글을 썼으니, 당대에는 얼마나 경이로웠겠는가?
  비문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적인 연구서가 거듭 나와도 난해함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여기서 진수를 맛보게 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긴한 대목 몇 군데를 들어, 실제 의미에서 멀어지는 것을 각오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풀이하기로 한다.
  절의내력을 말한 대목부터 보자. 진감이 지리산 자락에서 맹수와 함께 거처하다가 ‘화개곡花開谷’에 이르러 폐사廢寺를 발견하고 수리해 들어앉았다고 했다. 화개라는 지명을 신라 때부터 계속 사용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쌍계사가 있는 곳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이다. 고금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국왕은 개인적 발원보다 선정에 힘써야

  진감이 중국에 가서 공부한 것에 관해서는 ‘부도불원인夫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 시이동인지자是以東人之子 위석위유필야爲釋爲儒必也 서부대양西浮大洋 중역종학重譯從學’이라고 했다. 한 대목씩 옮겨보자. ‘무릇 도는 사람에서 멀리 있지 않다. 사람에게서는 다른 나라가 없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동인의 아들 신라 사람들이 불교도 하고 유교도 하는 것이 필연이므로, 서쪽 큰 바다를 건너 통역을 거듭하면서 배움에 종사했다.’고 했다.
  불교와 유학은 나라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진실을 갖추었으므로 바다를 건너가 언어 차이를 무릅쓰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진감과 최치원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각기 불교와 유교를 공부했다. 진감의 불교는 심오한 사상이지만, 최치원의 유교는 문장 쓰는 기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진감이 당나라에서 도를 닦을 때 ‘당사달지도當四達之道 직망갹이광시織芒屩而廣施’ 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사방으로 뻗은 거리에 앉아, 짚신을 삼아 널리 나누어주었다.’는 말이다. 그 일을 삼 년 동안 했다고 한다. 진감은 자기를 버리고 남들을 위해 봉사했는데, 최치원은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했다. 문장 수련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이름을 널리 알렸다. 당나라에서 얻은 관직을 자랑스럽게 여겨 글을 쓸 때마다 길게 적었다.
  국왕이 부처에게 소원을 발원해 달라고 청하자, 진감은 ‘재근수선정在勤修善政 하용원위何用願爲’라고 했다고 밝혀 적었다. ‘선정을 하는 데 힘써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발원은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한 말이다. 국왕더러 헛된 욕심을 버리고 직분에 충실하라고 일렀으니 놀랍다. 국왕이 서울로 오라고 거듭 불러도 진감은 응하지 않았다. 권력 때문에 진실이 손상되지 않게 하려는 고결한 처신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최치원은 국왕이 크게 인정해 중용하기를 간절하게 바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감은 범패를 잘 해서 ‘구슬프고 상쾌한 곡조를 내니 천상의 신이나 부처도 모두 기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기예가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최치원이 문장을 잘 써서 국내외에서 높이 평가된 것도 후대를 위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최치원이 전수한 글쓰기 능력은 한문학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
  진감은 세상을 떠나면서 ‘만법개공萬法皆空이니 무이탑장형無以塔藏形 무이명기적無以銘紀跡’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헛되니, 탑을 만들어 형체를 감추어놓지 말고, 비명을 지어 행적을 기록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한 말이다. 그런데도 따르는 사람들이 당부를 저버리고 탑과 비를 세웠다. 최치원의 글 솜씨로 진감의 행적이 더욱 돋보이게 했다.
  노자老子는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라고 했다.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앞 구절은 진감에게, 뒤 구절은 최치원에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진감은 깨달아 안 바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최치원은 알았다 할 것이 없으면서 많은 말을 했다.
  그러나 진감만 대단하게 여기고 최치원을 낮추는 것은 잘못이다. 최치원이 말을 남기지 않았으면 진감이 누구며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알았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진감은 최치원 덕분에 지금도 살아 있다. 진감과 만난 최치원은 표현이 뛰어난 데 그치지 않고 내용에서도 감동을 주는 명문을 남겼다.
  알고 말하는 사람, 알고 말하지 않는 사람, 모르고 말하는 사람, 모르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자 자신은 알고 말한 사람이면서, 알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했다. 알든 모르든 말을 해야 한다. 진위는 듣는 사람이 가리므로 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봄 기운에 들떠 꽃구경을 하려고 쌍계사에 갔다가 진감과 최치원 두 분의 만남에 동참해 고금의 만남을 이루니 얼마나 행복한가. 조상을 잘 두었다는 것이 이때 할 말이다. 후손이 보태야 할 것이 있어야 하기에, 당대의 만남과 후대와의 만남, 아는 것과 말 하는 것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돌아온다. 

    .....위의 글은 조동일교수의 '한국인다움의 증거를 찾아가다 의식각성의 현장'에서 발췌했습니다.조동일 교수님, 이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