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창조사(重創祖師)

중창조사(重創祖師)

쌍계사에 관한 고려와 조선 전기의 자세한 문헌자료는 없으나 1446년 선비대사의 팔상전 중수, 1506년 진주목사 한사개(韓⼠价)의 중수, 1549년 서산대사의 중수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사격(寺格)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존하는 사료들을 토대로 쌍계사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1549년 청허휴정(淸虛休靜)스님이 쓴 「지리산 쌍계사 중창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1549(중종 35)년에 세월이 오래되어 탱자가지가 숲을 이루고 비석이 초인들에 의해 박락(剝落)되어 있는 것을 보고, 중섬(仲暹)스님이 조정에 나아가 비석이 지극한 보배임을 알리고 조처를 취해줄 것을 간(諫)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조에서는 반경 5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에서는 나무를 치거나 불을 놓는 것을 금하였는데, 3년이 지나지 않아 주변 풍광이 예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에 팔영루(⼋詠樓) 5칸의 지붕을 다시 이고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 앞 뒤에 석대를 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물을 흐르게 했습니다. 1543(중종 38)년 여름에 운수승(雲⽔僧) 전수(專修)가 중창할 뜻을 세우고 시주를 모집 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대웅전을 세우고 차례로 금당과 방장을 지어 낙성을 하게 됐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으로 쌍계사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외의 기록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들로서, 청학루와 성보전에 보관된 현판류와 개인 문집 등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자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57년 침명한성(枕溟罕醒, 1801~1876)이 쓴 「영남하동 쌍계사 사적기문」현판을 보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숭정(崇禎) 연간(1628~1644)에 덕화(德化)스님을 화주로 하여 벽암당(碧巖堂) 각성(覺性)스님과 소요당(逍遙堂) 태능(太能)스님 등이 옛 터가 협소하므로 지금의 자리에다 별도로 중창했다고 합니다. 이때 응진당·명왕전·관음전을 비롯하여 화엄전·팔영루와 여러 요사를 건립하여 뜰 가운데 현재의 ‘진감선사대공령탑(眞鑑禪師⼤空靈塔)’비를 두게 됐습니다. 그 뒤 1675(숙종1)년에 인계(印戒)스님이, 1695(숙종21)년에 백암당(栢庵堂) 성총(性聰)스님이, 1735(영조11)년에 법훈(法訓)스님이 중수 하였으며, 1864(고종 1)년 봄에 담월(潭⽉), 용담(⿓潭)스님께서 금당 안에 육조정상칠층보탑을 건립했습니다. 1975년 후에는 고산(杲⼭)대선사에 의해 현재 모든 전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