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해동계맥을 중흥시킨 대율사
“스님의 법명은 낭오朗旿요 대은은 법호이며, 성은 배裵씨요 전남 영암 출신이다. 1780년(정조 4) 경자년에 태어나 15세 때 영암 월출산으로 출가하여 금담金潭선사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니, 금담선사는 선교禪敎의 거장인 연담蓮潭의 제자이시다.
율사는 그의 스승 금담장로金潭長老와 함께 계학의 멸실을 염려하고 순조26년(1826) 7월1일부터 하동 칠불암 아자방에서 사자간師資間 서원을 세우고 서상수계瑞祥受戒를 위해 기도하던 중, 7일째 되던 날 일도선광이 대은의 정상頂上을 비춰주는 감응을 받고, 스승인 금담이 제자인 대은에게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그리하여 자장이후 끊어졌던 해동계맥이 다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지리산 계맥은 금담선사를 거쳐 대흥사 초의의순草衣意恂에게 전수하였고 범해, 선곡, 용성, 동산, 석암, 고산스님으로 이어지고 있고, 쌍계사는 해동계맥의 중흥지가 되었다.
스님은 연담蓮潭, 백련白蓮, 의암義菴, 낭암朗岩, 완호玩虎, 연파蓮坡 등의 여러 큰스님을 찾아 공부하여 도를 이루고, 염화실에서 향을 사르고 스승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아 개당開堂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져 찾아오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으나 일월日月같은 정신과 송백松柏처럼 굳건한 수행은 변함이 없었다. 스님은 손수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베껴 써서, 좌우에 나누어 봉안하고 하루 세 번 예배하는 한편, 향과 차와 집기로써 공양하였다. 경론에 대한 신심은 철저하여 앉으나 누우나 항상 경론을 향하였으며, 경론에 쏟는 정성은 극진하기 이를 데 없어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스님은 교학敎學을 버리고 선문禪門으로 들어가 하루 한 번 식사를 하는 계율을 지켰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제방에서 초청하면 후학들을 지도하고자 여러 사찰을 전전하였다. 그때 스님의 교화를 돕기 위해 어떤 이는 등짐을 질 것을 자청하면서, “대은스님은 우리나라의 대선지식으로, 중국 남산 율종의 시조인 도선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며 찬미하였다.
1841년(헌종 7) 신축년 윤3월 25일, 두륜산頭輪山 만일암挽日庵에서 설법을 끝낸 뒤에 앉은 채로 담담하게 입적하시니, 세수62세요 법랍 47세였다. 지도자를 잃은 선림禪林의 대중들은 슬픔에 목이 메었다.
대은스님으로부터 법통을 받은 제자는 혜홍慧洪이요, 혜홍의 밑에 유진有眞스님이 있다. 이밖에도 대은스님 문하에서 교학을 배우고 선법禪法을 공부한 이는 매우 많았다.
월출산 상견암上見庵, 두륜산 만일암挽日庵, 달마산 지장암地藏庵, 덕룡산 천축사天竺寺, 반야산 무량사無量寺, 가지산 내원암內院庵, 조계산 삼일암三日庵과 칠전七殿, 동리산 미륵암彌勒庵, 쌍계사 불일암佛日庵,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의 승당僧堂에는 아직도 스님의 법풍이 스며 있으니. 그 가풍을 이어 청규淸規를 엄격히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