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정상을 모시고 와서 개산開⼭(산문)을 처음으로 열다
삼법화상은 의상대사의 제자
대비화상은 신라 백률사의 스님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 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 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대비화상은 신라 백률사의 스님으로, 당나라 홍주의 개원사에서 삼법화상을 만나 육조정상을 모시고 왔다. 대비화상의 생애는 이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삼법화상은 금마국⾦⾺國, 지금의 익산 미륵사의 규창圭昌스님이 당나라에서 귀환하면서 가지고 온 “법보단경法寶壇經”을 보고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고 하신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하였다. 이에 김유신⾦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 비구니스님에게 2만금을 빌려서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률사栢栗寺의 승려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서로 의논하여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의 정상頂相을 모셔오게 하였다.
삼법화상과 대비화상은 육조정상을 모시고 귀국하여 지금의 진주 대원사 쪽으로 가서 “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어디에다 모셔야 하느냐?”고 기도와 발원을 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발원을 하니 허공중에 문수보살이 청사자를 타고 나타나서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에 봉안奉安하라.”고 세번을 말했다고 한다.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즉 눈 속에 칡꽃 핀 자리를 찾아서 봉안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눈 속에 칡꽃 핀 자리를 우리가 육로로 걸어서 한번 찾아보자.”라고 한 것이다.
진주 대원사에서 산을 넘어 계속 찾아가는데, 지금 육조정상을 모신 자리에 오니동쪽은 덕봉이요, 육조정상 모신 산봉우리는 응봉이요, 또 앞에는 백운산 백운봉이다. 이 삼봉에 눈이 뽀얗게 쌓였는데, 오직 육조정상을 모신 그 자리만 눈이 녹아 동지섣달인데도 따뜻하고 칡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아! 여기를 말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어 육조정상을 봉안하니 지금의 ‘금당’자리다.
이후 삼법화상은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했다. 739년 7월 목욕을 하고, “법보단경”을 염송하다가 앉아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인혜仁慧, 의정義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