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의 정맥을 이은 대선사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쌍계사를 중창하다
대선사의 법명은 태능 太 能 이요, 소요 逍 遙 는 법호이다. 속성은 오 吳 씨요, 전남 담양사람이다. 1562(명종明宗17)년 기축년 9월 어느 날에 태어났으며, 어머니가 어떤 스님으로부터 잔 글씨의 대승경⼤乘經을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나면서부터 피부가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총명함을 나타내었다. 차츰 지각이 생겨남에 따라 탐욕을 멀리하고 도道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며 인자한 마음으로 보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그 마을에서는 모두 성동聖童이라 불렀다.
13세에 백양산⽩⽺⼭으로 놀러갔다가 세상 밖의 경계를 보고 곧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어, 진대사眞⼤師를 의지하여 삭발하고 경율經律을 배워 그 뜻을 철저히 밝히셨다. 그때 부휴대사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왕래하며 교화하였으므로 스님은 나아가 화엄경을 배우고 그 오묘한 뜻을 다 얻으셨다.
부휴의 회상會上에 수백 명이 있었지만, 오직 소요태능스님과 운곡충휘雲⾕沖徽와 송월응상松⽉應祥을 일컬어 법문法⾨의 삼걸三傑이라 하였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오랑캐를 치고 승리하여 돌아가는 길에 해인사에 머물다가, 대사의 단아함을 보고 부휴대사께 “백락伯樂의 마굿간에 뛰어난 말이 많구려”라고 하자, 부휴의 여러 제자들이 “태능이야말로 뛰어난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전부터 서산西⼭대사가 묘향산妙⾹⼭에서 교화를 펴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서래西來의 뜻”을 물었다. 서산대사는 첫눈에 스님이 법기임을 알아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바리를 전한 다음 3년 동안 지도하였다. 이윽고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자 청중이 그 문하에 가득하였는데, 당시 스님의 나이는 20세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산대사는 스님에게 법게法偈를 주셨다.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 초진수중구憔盡⽔中漚
가소기우자可笑騎⽜者 기우갱멱우騎⽜更覓⽜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 버린다.
우스워라 소를 탄 사람이여,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누나.
그 뒤 남방으로 내려와 여러 종장宗匠을 찾아 두루 물어보았으나, 그 뜻을 알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묘향산으로 가서 조사께 그 뜻을 물어 비로소 무생법인無⽣法忍을 얻고, 마음을 관觀하며 성품에 맡겨 거리낌 없이 소요하니, 머무는 곳마다 따르는 자가 구름처럼 달려오고 시냇물처럼 모여들어, 임제의 종풍宗⾵을 크게 떨치셨다.
임진왜란 때 서산西⼭과 송운松雲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로 나아가자, 스님은 불전에 재齋를 베풀어 정성껏 도움을 빌었으며, 병자년(1636, 인조14년)에 남한산성을 쌓는 역사가 있었을 때에는, 나라의 명령을 받들어 성城을 보완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으니,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서산이나 송운과 같은 길이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스님이 법을 설하는 자리에는, 잔나비가 경을 들으며 머리를 숙였고, 뱀이 법을 듣고 허물을 벗었으니, 그 교화가 이류異類에까지 미침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지리산의 쌍계사를 중건하고 신흥사新興寺와 연곡사燕⾕寺를 중창할 때는, 조정과 백성이 다 대사의 도화道化에 감화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이루었다. 1649(인조 27)년 기축년 11월 21일에, 스님은 열반을 이야기하던 중 붓을 찾아 임종게臨終偈를 쓰셨다.
해탈비해탈解脫⾮解脫
열반기고향涅槃豈故鄕
취모광삭삭吹⽑光爍爍
구설범봉망⼝⾆犯鋒鋩
해탈이 해탈 아니거니,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劍의 빛이 번쩍이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을 맞으리.
드디어 열반에 드시니 붉은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고 묘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법랍 88세였다. 다비하는 날 저녁에는 영골靈⾻이 불 밖으로 튀어나오고, 사리 2과가 축원에 의해 공중에 솟아올랐으므로, 연곡사燕⾕寺, 금산사⾦⼭寺, 심원사深源寺 세 곳에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효종대왕은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스님의 도道를 듣고 그 고풍⾼⾵을 흠모하였는데, 대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을 듣고 못내 슬퍼하였으며, 4년 후인 임진년(1652) 봄에는 특별히 명하여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실로 특이한 은전恩典이다. 또 중사中使를 시켜 향과 폐물을 하사하고, 상신相⾂인 백헌⽩軒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셨다. 소요당집 1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