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선禪과 차茶와 범패...( 휴봉 상훈스님)

쌍계사
2010-09-27 18:14
작성자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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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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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는 육조 혜능스님 정상탑을 모시고 있는 참선 도량이며, 창건주이신 진감국사께서 이곳 팔영루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범패를 만들고 시연하신 불교음악의 도량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차를 만들어 보급한 차의 도량입니다. 그래서 쌍계사를 선禪과 차茶와 범패의 도량이라고 합니다.

범패는 불가에서 재를 올릴 때 쓰는 의식 음악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일명 범음(梵音), 혹은 어산(魚山)이라고도 하며 인도(引導)소리라고도 한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성악곡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민속음악을 하는 학자들은 우리 음악의 뿌리를 범패에서 찾기도 합니다. 범패는 장단(長短)과 화성(和聲)이 없는 단성시율(單聲施聿)입니다. 또한 일정한 악보가 없이 구음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배움에 있어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범패의 유래로는 신라의 진감국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쌍계사의 진감국사 대공탑비에 의하면 진감국사는 804년에 세공사로 중국 당에 들어갔다가 830년 귀국하여 옥천사(지금의 쌍계사)에서 많은 승려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문』에는 다음과 갗은 범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선사는 범패를 잘하여 그 소리가 금이나 옥처럼 아름다웠다. 곡조와 소리는 치우치듯 날 듯 경쾌하면서도 애잔하여 천인들이 듣고 기뻐할만하였다. 소리가 먼 데까지 전해져서 절에는 배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나, 싫은 내색 없이 이들을 가르쳤다. 지금 중국 어산(魚山)의 아름다운 범패를 배우려는 자들이 앞다투어 옥천사(지금의 쌍계사)에 전해져 온 소리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이 어찌 소리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진감선사의 초기 범패교육은 중국 범패가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패 교육이 결과적으로 우리 범패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한 계기가 됐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일설에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노니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어산(魚山)을 창안했다는 구전설을 보더라도 현존하는 우리 범패의 역사적 근원을 진감선사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감선사로부터 전수된 범패는 범패승들에 의해서 전국 각지로 널리 퍼져 불교의식에 활용됐을 것이며, 지역에 따라 그 지방색이 곁들여져 또 다른 새로운 범패문화를 창출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범패는 묘음보살이 영축산에서 부처님께 현악불공을 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위나라의 조자건이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보고 범패를 익혔다는 데서 범패를 어산이라고도 합니다. 종류는 다양합니다. 상주권공재, 시왕각배재, 생전예수재, 수륙재, 영산재등이 있습니다. 상주권공재는 죽은 영가 천도를 위하여 올리는 범패로 하루 종일 걸립니다. 약식으로 49재에 사용되며 규모가 가장 큰 범패로는 영산재를 들 수 있습니다. “1일 권공 3일 영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산재는 보통 3일 계속하여 올리며 국가의 안녕이나, 나라의 국운 융창을 위하여 올렸습니다. 영산재는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실 때의 장면을 재현한 교향곡으로 첫째는 불공, 범패의식을 나타내고, 그 두번째는 영산최상곡이라는 관현악곡이 있습니다.


***** 진감선사*****
“진감 혜소(眞鑑 慧昭)선사는 신라 혜공왕 10년(774)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서 출생하였다. 31세에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 도일스님의 법을 이은 창주 신감선사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았다. 그 후 동방의 성인 흑두타로 불리면서 27년간 중국에서 머물다가 신라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였다.처음에는 상주 장백사에 주석하였으나, 지리산 쌍계사로 옮겨와 6조 혜능대사의 영당을 짓고 선풍을 진작시켰다.
진간선사는 중국에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 주변에 심었으며 진실함을 지키고 속됨을 싫어하는 수진오속(守眞忤俗)의 다풍을 선보였다. 아울러 범패의 종장으로서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았으며,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도량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