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⑩ 쌍계사 시자생활
탑전에서 효봉스님 시봉하며
‘초발심자경문’ 가르침 배워
구례장터서 책 사서 읽다가
틀켜 불 태우며 세속번뇌 씻어
잊지 못할 도반스님도 만나
출가해서 미래사에서 1955년을 보낸 법정스님은 이듬해 거처를 옮긴다. 스승인 효봉스님을 따라 쌍계사 탑전에서 본격적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다. 출가한 통영 미래사에서 스승을 모시고 살았지만 그때는 여러 대중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곳에서 스승인 효봉스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많은 스님과 신도들로 인해 수행의 장애가 있어 상좌이자 시자인 법정스님을 동행해 이듬해인 1956년 6월 17일 쌍계사 탑전으로 옮긴다. 수행처를 옮긴 기록은 법정스님이 동생인 박성직 거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나 있다.
“성직아. 그동안 공부 잘하고 있겠지? 집안도 고루 평안할 것이고. 나는 오늘 이곳 미래사를 떠난다. 스님을 따라 지리산에 있는 조그막한(조그마한) 암자로 가게 되었다. 나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들을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언제고 잘 있으니까. 할머님, 작은 아버님, 작은 어머님, 어머님 너희들 모두 함께 안부 전해드려라. 그럼 떠날 시간이 가까워 이만 논다. 내가 다시 너를 만날 때는 아무런 손색도 없는 훌륭한 고등학생이기를 고대한다. 또 그럴 줄 믿고 안심한다. 여름철에 몸조심하고 안녕히. 우리 어머님 말 잘 들어 드려라. 내 책들- 그림들도 다 평안하겠지. 쓸데가 있으면 책장 위에 놓인 신문들 써도 좋다. 하지만 내 냄새를 맡고 싶거든 그대로... 1956. 6. 17. 충무시를 떠나면서 우체국 창가에서 철 쓰다.” (<마음하는 아우야>,39페이지)
행자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법정스님은 세속에 대한 걱정이 편지글에 켜켜이 녹아 있다. 사촌동생인 박성직 거사에게 가족걱정과 더불어 특별히 어머님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은 애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박성직 거사는 법정스님이 출가한 이후 큰어머니인 법정스님의 모친을 끝까지 모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법정스님은 미래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도 한 두 편의 편지를 박성직 거사에게 띄운 듯하다. 1956년 4월 12일 보낸 편지에는 어머니가 하숙생을 받으며 함께 살았던 목포 대성동 집에 대한 상념들이 남이 있었다. 하숙생을 받는 문제며, 스님이 가지고 있던 책과 그림에 대한 애정도 아직 남아 있음이 보인다. 이웃에 대한 따스했던 인정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굳은 출가의지에 대한 다짐으로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다.
“저번 편지에서도 그랬지만 너는 내방에서 공부해야 된다. 학생들을 넣더라도 잘 알아보아서 공부 잘하고 착실한 사람을 택하여라. 내 책들은 잘 있다니 마음 놓인다. 벽에 붙은 그림들(밀레의 ‘만종’)에게도 안부 전해주라... . 복이 어머님께도 안부 전하고 그리고 대균네 형님, 형수 다들 평안하시데? 대균네 형수씨한테 내가 평안하신가 안부 묻더라고 꼭 일어주라. 성직아, 네가 내 대신 어머님의 아들 노릇을 해 줄줄 믿는다. 시키는 말 잘 듣고 잘 섬겨주길 바란다. 다시 한 번 부탁은 절대로 내 거처(있는 곳)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라. 서울이나 일본 같은데 가버렸다고 해 두어라. 철. 1956.4.12. 아침” (<마음하는 아우야>,34페이지)
법정스님 편지글 끝에는 추신으로 원고지 여백에 “이제는 내게 올 편지도 없으려니와 혹시 있으면 보내주던지 귀찮으면 편지 내용이나 이번처럼 적어 보내줘라.”고 적혀 있어 행자생활 기간동안에도 세간의 소식에서 귀를 귀울인 듯하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이런 세속일은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인 효봉스님을 모시며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에 접어들면서 바람에 날려 버린듯하다. 법정스님은 은사스님 몰래 구례시장에서 <주홍글씨>라는 책을 몰래 사서 읽다가 들켰다고 한다. 이 일화는 정찬주 소설가의 <무소유>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구례장을 다녀와서는 책을 태운 일도 있었다. 효봉스님은 법정이 행자생활을 할 때보다 더 엄했다. 하루는 구례장터에서 서점에 들렀다가 호손의 <주홍글씨>를 한 권 사서 탑전으로 돌아와 밤 9시 넘은 취침 시간에 고방(庫房)으로 들어가 호롱불 밑에서 읽다가 큰스님에게 들켰던 것이다. ‘세속에 미련을 두고 그런 것을 보면 출가가 안 되느니라. 당장 태워버려라.’ 법정은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태워버린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었지만 책이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고 있는 것을 본 순간 예전에 책 때문에 엎치락뒤치락거렸던 번뇌마저 타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956년 7월 법정스님은 사미계를 받고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인 효봉스님으로부터 <초발심자경문>을 배운다. 초발심자경문은 출가 수행자가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수행자의 기본지침서다. 효봉스님의 가르침을 받는 쌍계사에서는 적잖은 일화가 전해진다.
정찬주 소설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법정스님이 은사스님으로부터 경책받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화개장터로 장을 보러 갔다가 이것저것 구경하는 바람에 점심공양 시간을 조금 넘긴 적이 있는데, 효봉스님이 크게 실망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점심공양은 짓지 마라. 오늘은 단식이다. 나도 굶고 니도 굶자. 공부하는 풋중이 시간을 지킬 줄 몰라서야 되겠는냐!’ 효봉스님은 걸레를 짤 때도 걸레가 찢어지니 꽉 짜지 말 것, 비누도 조각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 때까지 쓸 것 등을 손수 시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이러한 스승의 행위를 닮는 것이 시자로서의 진정한 수행이었다.”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163∼164페이지)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 효봉스님을 시봉하면서 ‘무소유의 가르침’도 체득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찬주 소설가의 저서 <무소유>에서는 효봉스님의 걸망을 빨려고 하다 헝겊에 싼 비누조각을 보고 비누조각이 너무 오래돼 거품이 나지 않아 구례장에 가서 새 것으로 하나 더 사려다가가 효봉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중이 하나만 있으면 됐지 왜 두 개를 가지겠느냐. 두 개는 군더더기이니 무소유라 할 수 없느니라.” 법정스님이 강조했던 금싸라기같은 지혜인 ‘무소유의 가르침’이 언 듯 보이는 대목이다.
법정스님도 자신의 저서에서 쌍계사 탑전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중이 되어 스승을 모시고 처음으로 지낸 곳이 지리산에 있는 하동 쌍계사 탑전, 섬진강 건너 백운산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선원이었다. 입선(入禪)시간이 되면 방이 비었을 때도 죽비 소리가 저절로 울린다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착실한, 아주 착실한 풋중 시절을 보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맑고 투명한 시절이었다. 한겨울 맨밥에 간장만 먹고 지내면서도 선열(禪悅)로 충만하던 나날이었다. 오늘과 그 시절을 견주어 볼 때 그때가 A학점이었다면 오늘은 D나 E밖에 안 될 것 같다. 그것도 점수를 후하게 주어서. <화엄경>에 ‘초발심 때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은 모든 발심수행자에게 귀감이 될 교훈이다.”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1996, 254페이지)
쌍계사 탑전에서 법정스님은 잊을 수 없는 도반을 만난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저서 <영혼의 모음>과 <무소유> 두 곳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수연스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연스님을 만났을 당시는 은사인 효봉스님이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 참석차 출국한 터라 혼자서 동안거를 지내고 있던 시기였다.
“1956년 겨울, 나는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혼자 안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음력 시월 초순 하동 악양이라는 농가에 가서 탁발을 했다. 한 닷새 한 걸로 겨울철 양식이 되기에는 넉넉했었다.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니 텅 비어 있어야 할 암자에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걸망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 보았다. 낯선 스님이 한 분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나그네 스님은 누덕누덕 기운 옷에 해맑은 얼굴,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합장을 했다. 그때 그와 나는 결연이 되었던 것이다.”
동안거를 같이 보낸 법정스님은 정월 보름 해제일이 되어 심하게 앓았던 기억과 구례장까지 걸어가서 약을 지어 와 정성껏 보살펴 준 스님과의 인연이 해인사에서까지 이어져 자비심을 심어준 ‘진정한 도반’으로 오랫동안 기억했다.
법정스님이 사촌동생인 박성직 거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동안거를 나기 전 목포를 다녀오기도 했고 1956년 11월 동안거는 여수 흥국사에서 시작해 한달 후 쌍계사 탑전으로 옮긴 기록이 보인다. 그 이유에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 법정스님은 쌍계사 탑전에서 1957년 정월 보름 동안거를 해제하고 4월까지 2개월여 동안은 고창 선운사에서 지내기도 한다. 사촌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마음에 흡족치 않아,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것이 이제껏 약간의 사정으로 머무르게 되었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선운사에 잠깐 머물렀던 스님은 1957년 초여름 즈음 해인사로 수행처를 옮겨 고려대장경과 인연을 맺는다.
취재협조 : (사)맑고 향기롭게
쌍계사·여수·구례=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60호/2020년2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