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혜능조사 六祖惠能祖師

육조혜능조사 六祖惠能祖師

638 - 713

육조혜능조사는 중국 선종의 제6대 조사이고. 중국 당나라 광동성廣東省 신주新州 출생 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느 날 장터에서 “금강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출가 발심을 하였다. 당 고종 때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소양으로 갔다가 무진장無盡藏 비구니가 “열반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였으며, 그 이후 제5조 홍인弘忍대사 문하에 출가하여 홍인대사의 선법을 이어 받고 중국 선종의 제6대조가 되었다. 676년 남방으로 가서 교화를 하였고, 조계산에 들어가 무상대열반의 법을 선양宣揚하는 중에 측천무후 태후가 효화孝和 황제의 글을 보내어 초청하였으나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으며, 당나라 현종 때인 선천 2년 8월에 원적에 들었다. 그때 나이 76세였다.

중국 당나라 때 달마 조사로부터 시작된 선종의 법맥을 이은 5대 조사인 동산사의 홍인 대사는 법과 의발을 전수하기 위해, 대중에게 깨달은 바를 게송偈頌으로 지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홍인대사 문하의 교수사敎授師였던 신수화상이 게송을 지어 벽에 붙였다.

신시보리수⾝是菩提樹
심여명경태⼼如明鏡台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물사야진애勿使惹塵埃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먼지가 끼거나 때 묻지 않도록 하세.

이 때, 절의 방앗간 행자로 있던 혜능은 지나가던 스님에게 벽에 붙어 있는 게송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여 게송을 듣고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臺
본래무일물本來無⼀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서 먼지 끼고 때가 일까?

육조혜능조사는 선禪불교 즉 선종을 완성한 인물이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는 중국 땅에서 혜능조사를 만나 선불교로 재탄생 했다. 혜능조사가 실질적으로 창시한 선불교와 선종은 이후 유가, 도가와 함께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조계”는 바로 혜능이 선법을 선양했던 중국 광동성의 차오치(조계曹溪)라는 지역의 이름이자 혜능 선사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육조혜능조사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저잣거리에서 나무를 팔다가 우연히 탁발승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동산사로 가서 행자가 되었고, 절에 들어간 뒤에도 여덟달 동안 방아 찧는 일이 그가 한 수행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불성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스물한살의 나이에 홍인화상의 법을 이어 중국 선종의 육대조사가 되었다. 스님들을 가르치는 교수사였던 신수화상의 게송과는 달리, 깨달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게송 하나로 일자무식인 천출의 방앗간 행자(계받기 전)가 진정 깨우쳤다는 것을 알아차린 오조 홍인조사는 법맥 계승의 증표인 가사와 발우를 그에게 전하여 육대 조사가 된 것이다. 깨달음에는 귀천과 서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행자가 바로 육대조인 혜능조사다. 이후 1300여년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마음의 혁명가” 혜능의 등장은 중국불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그가 이루어낸 불교의 혁명적인 변화만큼이나 혁명적이었다.

이후 본격적 수행을 거쳐 서른아홉살에 정식 승려가 된 혜능조사는 고행을 강요하는 인도 불교를 일상 생활속의 불교로, 귀족 중심의 불교를 일반 농민들과 평민들의 종교로 개혁했다. 일반 백성들을 위한 불교를 주창했던 혜능조사는 왕실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백성들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전법에 모든 것을 바쳤다. 자아를 존중하는 정신해방을 고취시킨 혜능조사의 선사상은 “평등성중平等性中의 무피차無彼此”, 평등한 본성자리는 차별이 없다는 평등사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혜능조사는 중생과 부처, 세간과 출세간이 모두 평등하며, 사람마다 불성을 가지고 있어 모두가 성불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그렇게 깨달았듯이, 그는 고행과 문자에 얽매였던 불교 수행을, 평민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체득해 온 직관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는 “돈오頓悟”를 주창했다. 자기해탈과 함께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수행하는 “자오자수⾃悟⾃修”의 수행론을 강조했고, 민초들이 일상속에서 생업과 선수련을 병행하는 “선농병행禪農竝⾏” 수행을 도입해 민초들을 불교로 끌어들였다. 해탈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며, 평상의 일상생활이라는 현실을 절대 떠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설법집 “육조단경”은 조사어록이 아닌 “경經”, 즉 부처님 말씀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전해져오고 있다.

육조혜능조사는 내가 열반한지 70여년 후에, “동방에서 두 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고 하셨다. 육조혜능조사의 예언대로 삼법, 대비화상이 육조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이곳 쌍계사에 모셨다. 쌍계사는 육조정상을 모심으로 해서 한국불교의 근본도량인 선종대가람으로 1,300여년 선종의 정통법맥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