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속의 쌍계사

[불교신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호리병 속 별천지' 하동 쌍계사

쌍계사
2021-06-10 11:32
작성자
쌍계사
작성일
2021-06-10 11:32
조회
807

“너무 힘들 때는 여기, 최치원 별천지 가보세요”

쌍계사 가람은 호리병 형태로
입구 일주문에서 중간 금강문
천왕문 지나 팔영루에 이르면

영역이 크게 확장 별천지 같은
대웅전을 맞이하게 되니 과연
“꽃길만 걸으세요 …” 실감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 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약사불ㆍ아미타불을 중앙에, 그리고 이 세 부처님 사이에 일광·월광·관음·세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 17세기 전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하동 쌍계사 대웅전 목조 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약사불ㆍ아미타불을 중앙에, 그리고 이 세 부처님 사이에 일광·월광·관음·세지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 17세기 전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요즘 유행하는 덕담에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있다. 누군들 편히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참고 견디며 살기에 ‘사바세계’라고 한다. 너무 힘들 때는 호리병 속 별천지 하동 쌍계사로 떠나보면 어떨까?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仙人堆玉枕 身世倏千年
春來花滿地 秋去葉飛天
至道離文字 元來在目前

“동쪽나라의 화개동 골짜기에는 호리병 속 별다른 하늘 있는지/ 신선이 옥 베개를 밀쳐둔 채로 몸과 세상 어느덧 천년이 갔네// 봄이 오면 꽃은 땅에 가득하고 가을 가니 낙엽 하늘을 나르네/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있어 본래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네.”

 

1591년경 쌍계사 스님이 바위틈에서 종이 한 쪽을 발견했는데 바로 고운 최치원(857~?)이 지었다고 전하는 ‘화개동(花開洞)’ 시의 일부이다. 최치원은 이 화개동에서 지팡이로 바위에 ‘쌍계석문’이라 새기고 학이 되어 날아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눈앞에 보이는 쌍계사의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신선이 옥 베개를 떨쳐버릴 만큼 쌍계사는 호리병 속 별천지로 무아지경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국보 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이수 중앙에 ‘唐海東故眞鑑禪師碑(당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쓴 두전(頭篆 신라 887년). 최치원이 물고기가 튀어 올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서체로 범패소리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보 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이수 중앙에 ‘唐海東故眞鑑禪師碑(당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쓴 두전(頭篆 신라 887년). 최치원이 물고기가 튀어 올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서체로 범패소리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쌍계사는 진감선사 혜소스님(774~850)이 830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 옛날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육조 혜능선사의 정상을 모셨던 곳에 전각을 짓고 옥천사(玉泉寺)라 했는데 신라 정강왕이 ‘쌍계사(雙磎寺)’로 바꾸었다. 특히 최치원은 ‘당해동고진감선사비’에서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연화장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는 말은 정말이구나” 했다.

 

왜 ‘별천지’라 했는가?


쌍계사 가람 배치는 최치원이 말한 호리병 형태로 별천지를 느끼게 한다. 호리병 입구 일주문에서 중간 목 금강문, 넓은 목 천왕문을 지나 팔영루에 이르면 영역이 크게 확장되어 호리병 속 별천지의 세계, 대웅전을 맞이하게 된다.


별천지로 들어가는 일주문은 기둥사이로 보이는 주변 경치로 인해 지붕만 화려하게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 환상적인 멋을 불러일으킨다. 일주문은 차별하고 분별하는 중생의 생각을 하나로 모아서 절대 평등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거대한 바다가 모든 흐름의 의지처가 되는 것처럼 차별이 있는 도리가 모두 깨달음의 바다로 돌아온다”고 했다.


좁은 호리병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단련시켜 사홍서원을 굳건히 다지는 곳이 금강문이다. 오른쪽에는 밀적금강이 방어 자세를 취하고 그 옆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가 있다. 사찰로 들어갈 때 불법(佛法)을 배워 번뇌를 끊는 것이 문수의 지혜와 같고 용맹스러운 사자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들어오는 사람에게 일러준다. 맞은편 왼쪽에는 나라연금강이 공격 자세를 취하고 그 옆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다. 중생을 다 건지고,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코끼리의 힘으로 보현보살의 실천행을 해야 함을 나가는 사람에게 일러준다. 그래서 금강문의 사자와 코끼리는 서로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쌍계사의 밀적과 나라연금강이 서로 바뀌어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육조정상탑전각. 내부에 중국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頂相), 두개골을 모신 탑이 있다.
육조정상탑전각. 내부에 중국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頂相), 두개골을 모신 탑이 있다.
 

호리병의 목이 넓어지는 지점에 자리한 천왕문을 지나면 둥근 호리병이 커지는 곳에 진감선사가 범패(梵唄)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팔영루(八泳樓)가 나온다. ‘팔(八)’자는 부처님의 여덟 가지 음성으로 극히 아름답고, 유연하며, 조화롭고, 들으면 깨닫게 되고, 외도를 굴복하게 하고, 바른 견해를 갖도록 하며, 깊고 멀리까지 들리며, 거침이 없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을 나타냈다. ‘영(泳)’자는 이러한 부처님의 목소리는 물고기가 뛰 놀 듯, 산을 오르듯 자유자재하여 범패를 나타냈다. 진감선사는 범패를 잘해 능히 부처님을 환희케 했다고 한다. 중국 범패와는 달리 그 소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 모습을 범패로 표현하여 어산(魚山)을 창안하여 보급했다. 선사는 내면의 세계를 안으로 추구하는 선(禪)과 밖으로 표출하는 범패가 둘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진감선사 비문을 지은 고운 최치원 진영(국립진주박물관, 1793년).
진감선사 비문을 지은 고운 최치원 진영(국립진주박물관, 1793년).
 

‘국보 중의 국보’ 진감선사비


쌍계사에는 국보 중의 국보(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당해동고진감선사비(唐海東故眞鑑禪師碑)’가 있다. 진감선사가 옥천사에서 선(禪)과 교(敎), 차(茶)와 범패로 불법을 펼치다가 850년 정월에 입적하자, 헌강왕은 그의 시호를 ‘진감선사’,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했다. 최치원은 왕명을 받아 찬술한 비문에서 ‘진감선사를 조계의 현손’이라 하여 육조 혜능대사의 적통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이수 중앙에 ‘당해동고진감선사비’라고 쓴 두전(頭篆)은 특이한 서체로 백미중의 백미이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듯, 춤추는 듯 너울거리는 필체는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왜 이런 서체를 썼을까? 최치원은 범패소리를 글자로 표현하여 선사에게 최상의 예경을 표했다. 물고기가 튀어 올라 하늘로 솟아오른 것 같은 두전으로 진감선사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두전을 향해 신령스런 기운을 뿜어내는 두 마리의 용 또한 상서롭기 그지없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아미타불을 중앙에, 그리고 이 세 부처님 사이에 일광·월광·관음·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세 부처님 얼굴은 둥글넓적하며, 육계는 나발이 솟구쳐있고 중앙에 계주와 머리 꼭대기에 정상 계주가 표현됐다. 서 계신 네 분의 보살은 배를 앞으로 약간 내민 듯 늘씬한 체구에 화려한 보관과 귀걸이·목걸이·팔찌로 장식하여,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인조 17년(1639)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쌍계사 일주문. 지붕이 화려하고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 환상적인 멋을 불러일으킨다.
쌍계사 일주문. 지붕이 화려하고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 환상적인 멋을 불러일으킨다.
 

특이한 전각 ‘육조정상탑전’


대웅전 옆 계단을 오르면 ‘육조정상탑전’이란 특이한 전각과 함께 그 내부에는 탑도 있다. 중국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頂相), 즉 두개골을 모신 전각이다. 신라 성덕왕 때 삼법(三法)스님은 중국 보림사 육조탑에서 혜능대사의 정상을 모셔와 경주 영묘사에서 공양하였다. 꿈에 육조대사가 지리산으로 옮겨 달라고 하여 호랑이가 길을 안내한 곳에 석함에 넣어 땅 밑에 안치했다.

그 후 신라 민애왕 때 진감선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六祖影堂)이라 했고, 1800년대에 용당스님이 목암사의 7층 석탑을 옮겨와 석함 위에 세운 이후부터 ‘육조정상탑’이라 했다. 이는 육조혜능대사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신앙심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나라가 남종선의 적자임을 나타내었다. 건물의 앞쪽에는 조선시대 명필인 추사 김정희가 쓴 ‘육조정상탑’,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曹宗六葉)’ 편액이 걸려있다. 세계는 부처님이란 하나의 연꽃과 달마에서 혜능까지 6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신문3669호/2021년6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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