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는 통일신라 723(성덕왕22)년에 삼법과 대비 두 화상이 육조혜능조사(六祖慧能祖師)의 정상(頂相), 즉 두상을 봉안하고 작은 움막을 세운 것이 그 시초입니다.
삼법화상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으나 쌍계사의 개산과 창건에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있으며, 이를 정리하여 생애와 쌍계사 개산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법화상의 출생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661(문무왕 1)년경에 태어나 739(효성왕 3)년에 입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76(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너무도 총명하여 경장과 율장을 통달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육조혜능조사께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가서 도를 묻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4(성덕왕13년)에 육조혜능조사가입적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6년이 지난 뒤 금마국(⾦⾺國) 미륵사(彌勒寺)의 주창(主晶)스님이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육조혜능조사의 설법집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던 중에 육조혜능선사가 이르기를, “내가 입적한 뒤 70년이 지나서 유이보살(有⼆菩薩)이 종동방래(從東⽅來)하리니, 동방에서 두 명의 보살이 와서 동토유연지국토(東⼟有緣之國⼟)에 가서 불법을 널리 홍포하리라.”는 대목을 읽다가, “내가 마땅히 힘껏 도모하여서 우리나라에 만대萬代의 복전福⽥을 지으리라.”고 생각하고 이에 김유신(⾦庾信)의 부인이었던 법정(法淨)비구니에게 2만 금을 빌려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서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머물렀다. 그곳에는 신라 백율사(栢栗寺)의 대비선백(⼤悲禪伯)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의논하던 중, 이 절에 기거하던 장정만(張淨滿)에게 2만금을 주고 육조혜능조사의 정상頂相(두상)을 취하여 오게 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법정비구니가 머무는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이 꿈에 나타나,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 눈속에 등나무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비선백과 함께 눈덮힌 지리산을 헤매다가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과 같고 등꽃이 만발한 곳이 있어 이곳에 돌을 쪼아서 함을 만들고 깊이 봉안한 뒤 조그마한 움막 속에서 선정 닦기에 힘썼다. 18년 동안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739년 7월 12일에 목욕하고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염송하다 앉아서 입적하였다. 문인들이 유체를 받들어 운암사(雲巖寺)에 유장하였다.”
이와 같이 쌍계사의 개산은 삼법과 대비화상이 육조혜능조사의 정상을 봉안한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