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임제종의 정맥을 잇다
현재 한국불교 강원교재의 시조
스님의 법명은 지엄, 법호는 야로埜⽼, 야埜는 야野의 고자古字. 당호는 벽송이다. 속성은 宋씨, 아버지는 복생, 어머니는 왕씨이다.
어느날 어머니 꿈에 한 인도스님이 예를 올리고 간 뒤에 조선 세조10년 1464년 3월 15일 지엄스님을 낳았다고 한다. 아이는 특이한 골격과 기상이 웅혼하였고, 글공부와 칼쓰기를 좋아하고 병서에 능했다.
조선 1491(성종 22)년 여진족이 쳐들어오자 도원수 허종과 함께 이마차와 싸워 큰 공을 세웠으나 세상의 속절없음을 느껴 출가의 뜻을 굳힌다. 그는 “대장부로 태어나 심지⼼地를 지키지 않고 헛된 명예를 쫒아 외부로만 치닫겠는가”하고, 계룡산 상초암에서 조징祖澄대사에게로 출가한다. 그후 교학에 밝은 연희 스님을 찾아가 ‘원돈교의‘를 묻고 벽계정심 선사를 찾아가 ‘달마가 서쪽으로 온 뜻’을 일깨움을 받았다.
1520년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외부와의 교제를 끊고 불법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초암에 머물며 옷을 갈아입지 않고 하루 두번 먹지 않고 정진을 거듭했다. 문을 닫고 외부와 교류를 일체 두절하여 거만하다는 비방을 많이 받았다. “장자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마음을 알겠는가”라고 하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뒤 문인 영관靈觀 원오圓悟 일선⼀禪 등 60여 명에게 대승경론과 선을 가르쳤다. 또한, 선원집禪源集과 법집별행록法集別⾏錄으로 초학자들을 지도하여 참다운 지견知⾒을 세우게 하고, 선요禪要와 대혜서장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 네가지 문헌은 현재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서 사찰 강원 사집과四集科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강원교재의 연원은 벽송지엄선사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이 ‘하나’라는 것은 진眞이다, 망妄이다 하는 분별을 떠나, 이름과 형태와는 상관없이 굳세고 산뜻하고 걸림이 없는 것이다. 만약 삼라만상이 다 여래의 실상이고, 견문각지가 모두 반야의 신령스런 광명이라면, 외도의 견해라 어찌 한 맛의 선정, 일미선⼀味禪이 생길 수 있겠는가” 1534년 겨울, 제자들을 화개 수국암에 모아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이 노승은 여러분을 위해 적멸상寂滅相을 보이고 가리니, 여러분은 밖으로 향해 찾지 말고 더욱 힘쓰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시자를 불러 차를 다려 오게 하여 마신 뒤 문을 닫고 단정히 앉더니 한참동안 잠잠해서 제자들이 창을 열고 보니 벽송선사는 이미 열반에 드셨다. 11월 초하루 진시였다. 입적한 뒤에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고 팔다리는 마치 산사람처럼 부드러웠다. 다비하는 날 밤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뻗치고 재를 올리는 날 새벽 상서로운 구름이 허공에 가득 서리었다. 부도탑을 본래 지리산 화개 의신동 남쪽 기슭에 봉안하였다. 이 절이 폐사된 후에 1798년 3월에 쌍계사 서쪽 옥천 기슭에 이안하였다.
대사는 태고보우로부터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서산휴정으로 이어지는 해동 임제종의 정맥을 이은 분이며, 현 조계종의 법통을 전해준 분이다. 대사로 대표되는 조선조 재야선문은, 종단의 유지보존과 관련된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 고려중기 수선사의 엄격한 수행정신과 철저한 출세간주의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선사의 선풍을 진작하는데 핵심적인 이론이 돈오점수와 간화선에 있었음을 알고, 지눌과 대혜, 그리고 종밀의 선사상을 조합하여 강원의 교육과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조와 현 조계종 전통강원의 뼈대를 세우신 분이 대사이시며 대사의 진영을 보고 법손인 휴정서산대사의 찬술이 있다.
진단지피震旦之⽪ 천축지골天竺之⾻
화월이풍華⽉夷⾵ 여동생발如動⽣髮
혼구일촉昏衢⼀燭 법해고주法海孤⾈
명호불민鳴呼不泯 만세천추萬歲千秋
조선의 피부에 인도의 뼈로다.
중국의 달 동이의 바람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듯 머리털이 나는듯 하네.
어두운 거리의 한 촛불이며, 진리의 바다에 한조각 배 였어라.
아아 스님의 위대한 모습,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으리.
– 명종 15년 (1560) 여름 두류산 법손 휴정이 쓰다.